시간이 머무는 책방은 헌책과 새 책이 약 8대 2의 비율로 구비돼있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들과 절판된 책을 만날 기회가 있다. 장르를 보면 철학 기반의 자기계발서가 주를 이룬다.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서적 그리고 범우사의 문고판 시리즈 등이다. 박성길 책방지기는 범우사 문고판을 특히 좋아한다.
사람에 따라서 책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수단이 된다.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안내자가 되며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며 위로해 주는 친구도 되어준다. 박성길 책방지기에게 책은 ‘배움을 주는 스승’이다.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들 특히 지혜를 성길씨는 책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그 기능에 초점을 맞춘 책들을 선별한다.
새 책이라고 해도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 많다. 성길씨는 책이 가지는 ‘시간의 힘’에 주목한다. 좋은 책이라는 것이 바로 이 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의 선택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책의 가치를 입증한다는 것.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이 책을 매개로 이곳에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만이 그 ‘시간’ 안에 머물며 자신만의 ‘시간(추억)’을 획득한다. 물리적인 시간을 우리는 붙잡을 수 없지만 관념으로서의 시간은 자유로이 확장이 가능하다.
이곳은 처음부터 무인책방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무인책방 운영을 제안했는데 꽤 일리가 있었다. 일면식 없는 사람 둘 이상이 함께 있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분명 있을 수 있고, 그러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제주에 100개의 책방을 세우기 위해선 성길씨는 그즈음 밖에서 봐야 할 일들이 많기도 했다. 성길씨도 이곳을 찾는 이도 서로 불편함 없이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 ‘무인책방’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덕에 손님이 더 많이 찾고 있다.
혹시 상주하는 사람이 없어서 도난이나 분실의 걱정은 없냐고 물어봤다. 책 도둑은 괜찮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그 책을 가지고 가서 그 사람의 인생이 더 나아지고 그 사람이 성장하는 것이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니 오히려 보람을 느낄 것 같다고. 다행히 아직 책을 비롯한 책방내 물건을 무단으로 가져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열린 공간을 예의 없이 이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성길씨는 이곳에 오는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온 것처럼 푸근하면서도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으면 해서 간식거리와 간편한 먹거리 등도 준비해뒀다. 그런데 이를 마음껏 먹고 마시고는 이른바 ‘먹튀’하는 사례가 몇 차례나 된다.
책 가격은 책의 뒷면에 적혀 있고, 각종 먹거리와 음료의 가격도 다 정리돼 있다. 책 값이나 이용료는 현장에 부착돼 있는 계좌로 입금하면 되니 이용에 참고하길 바란다. (CCTV가 설차돼 있으나 감시용이라기보다는 보안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머무는 책방’이라고 쓰인 간판이나 현판 옆에 ‘제주보물지도’란 꼬리가 붙는다. 실체가 있는 지도로, 이곳에서 무료 배포 중이다. 이 지도에는 광고를 낀 관광지나 숙박, 음식점이 아닌 진짜 제주의 속살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을 선별해 놓았는데 성길씨가 돌아다니면서 엄선한 곳이다.
성길씨는 제주에 정착한 후 놀란 점들이 몇 가지가 있었다. 소문이 자자했던 바가지 요금이 정말 있고, 또 심한 편이라는 점과 제주도민들이 생각보다 도내 곳곳을 여행할 기회가 적다는 점이다. 생활에 치이기도 할테고,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있겠지만 이 아름다운 곳을 도민이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고. 그래서 누구나 부담 없이 갈 수 있지만 꼭 가봐야 할 제주 명소를 엄선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제주보물지도’를 챙겨들고 섬 나들이를 떠나도 좋겠다.
쉰이 넘어 제주 정착을 택하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책방 운영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 성길씨는 후회한 적이 없을까? 사실, 성길씨는 이곳을 운영하기 전엔 카페를 열었는데 아주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더라도 결국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이 다 자아의 확장이잖아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나 자신을 알수록 나 다운 삶을 사는 거죠.’
나다운 삶이란 뭘까? 흔들릴지언정 무너지거나 휩쓸리지 않을 마음의 줏대가 있고, 개인적이지만 공공의 선을 지키며 끝없이 자신의 우주를 넓혀 가는 것. 결국 나다움을 알려면 내가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을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책이 필요하다.
‘책을 대면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보이거든요. 책방에 왔다는 것은 그것도 이렇게 인적 뜸한 바닷가의 책방에 찾아왔다는 것을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이 이곳에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면서 운명처럼 끌리는 책을 꼭 얻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까치설이 지나고 우리의 설을 이번 주말에 맞는다. 2023년에는 제주 곳곳의 책방에서 좋은 책을 통해 ‘나다움’을 환기하는 시간 안에 종종 머물기를.
※시간이 머무는 책방은 서귀포시 성산읍 환해장성로 65에 있어요.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무인책방입니다.
곳곳에 책방지기의 연락처가 있으니까
필요시 연락하시면 도움받으실 수 있어요.
박성길 책방지기는 범우사의 문고판 시리즈 중 두 권을 추천했는데 존 러보크의 <인생의 선용>과 보나르의 <우정론>이다. 작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언제 펼쳐도 삶의 방향을 일러줄 수 있는 책이라며 추천 배경을 밝혔다.
#. 인생의 선용 / 존 러보크
존 러보크는 19세기 영국의 은행가이면서 인류학자, 고고학자로 자연과학과 고고학에 관련된 저서뿐 아니라 인생론과 도덕성에 관한 책도 두루 남겼다. <인생의 즐거움>, <평화와 행복>, <문명이 기원과 인류의 원시상태>, <선사시대> 등이다. 1896년에 발표한 <인생의 선용>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가 녹아나 있다.
책에서는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능보다 지혜가 중요’하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지혜로워질 수 있으며, 예의를 지키는데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능력보다 인격에 기인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개인적인 처세술, 사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팁, 사업을 위한 교섭 방법 등이 담겨 있다.
#. 우정론 / A.보나르
20세기 초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A.보나르는 <친한 사람들>, <왕위>. <프랑스와 그 死者>등의 시집을 펴냈다. 중국여행기 <중국에서>와 소설 <인생과 연애> 등을 펴냈다. <우정론>은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모두 6부로 이뤄졌는데 진정한 우정과 우정과 애정의 차이, 남녀 간의 우정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참고로 박성길 책방지기는 이완 작가와 함께 <시간 부자>, <청년 정신>을 펴낸 작가이다. 두 책 모두 현재 절판된 상태지만 ‘시간 관리’와 ‘삶을 어떻게 의미있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구해 읽어봐도 좋겠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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