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섬과 제지기 오름의 마을, 서귀포시 보목리.
파아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과 섬이 마주한 곳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날엔 윤슬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봄부터 여름이면 자리돔이 마을에 활력을 더한다. 일년내내 푸른 빛을 뽐내는 제지기오름은 특히, 한여름에 오르면 동화 속 신비한 숲으로 초대받은 듯 매력이 상당하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서 몸마저 무거울 때 나는 종종 보목리로 향했다. 다리를 바삐 움직여 오름에 올랐다 내려오면 섶섬과 바다가 ‘난 늘 여기 있을거야. 언제든 기대.’라고 하는 것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보목리는 ‘한낮의 산책’을 하는 마을로 의미가 하나 더 생겼다.
2019년 5월, 바다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로스터리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1년 뒤 그 자리는 책방으로 거듭났다. 오늘 소개할 ‘책방 백주산보’다. 백주산보(白晝散步)는 ‘한낮의 산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산책하기 좋은 마을에서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산책을 권하는 곳이다.
책방주인은 영화와 사진을 좋아한다. 그래서 카페만 운영하고 있을 때 ‘관련 책을 카페에 좀 갖다 둬야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방을 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코로나19다. 카페를 찾는 사람이 없는 날들이 들쑥날쑥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쉼(休)을 제공하고 싶었으나 가게를 쉬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이참에 공간의 활용도를 더 높이자는 생각을 했다.
백주산보는 공간이 크게 둘로 나뉜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왼편은 카페겸 책방이고 오른편은 갤러리이자 문화공간이다. 현재 고진숙 사진가의 사진전이 갤러리에서 진행 중이다. 고진숙 사진가는 백주산보의 책방지기이기도 하다. 사진가이자 책방지기, 바리스타, 어머니, 아내, 제주이주민, 정다운 이웃 등 그를 수식할 표현이 많다.
고진숙 책방지기는 2019년 1월 31일 제주로 이주했다. 정년 퇴임한 남편과 남은 생을 지금까지 살아보지 않았던 곳에서 살기로 하고 결정한 곳이 제주 보목리였다. 남편이 2016년쯤 자전거로 제주 곳곳을 여행했었는데 보목리에 한눈에 반했다고. 바다가 지척이었고 산도 가까웠다. 고른 수평선만큼이나 반듯한 마을 풍경 또한 멋스러웠다.
제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는 전북 전주에 거주했었다. 늘 가던 곳, 늘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지내다가 제주로 와서는 카페와 책방,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섬인 이곳에서 오히려 인연이 확장돼 남녀노소, 지역을 떠난 벗이 늘고 있단다.
이곳의 서가는 영화와 사진 관련된 책들로 구성돼 있다. 이쪽 방면에 관심이 깊고 관련 공부를 한 이들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법한 전문적인 책들이 꽤 된다. 사진과 영화를 즐기는데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면 이 책방이 갖춘 책들을 하나씩 구매해 공부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앞서 문화공간에서 고진숙 책방지기의 사진전이 진행 중이라고 얘기했다. 그녀의 첫 책이 지난해 발간됐다. 그를 기념하며 마련된 전시로 그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9년 어느 날, 우연히 한 갤러리에 들어갔는데 흑백사진을 보고 한 사진가와 인연이 닿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진을 배우게 됐다. 사진가의 이름은 박성민. 선생의 제자들과 함께 낮에 출사를 다녔다. 이전까지 고진숙 책방지기에게 사진은 특별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 찍는 기념사진 의미 외에 다른 뜻이 없었다. 하지만, 박성민 사진가의 작품을 보던 날, 그에게 사진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출사를 다니면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오는 대상들이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잡초라고 불리는 풀, 바람결에 날리는 현수막 천조각, 햇살에 이글거리며 피어나는 아지랑이.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이 없었다. 관심을 두지 않아서 몰랐을 뿐 모든 존재하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시들었다고 해서 꽃이 꽃이 아닌게 아니라는 것을 한낮의 출사를 통해 생(生)을 새롭게 배웠다.
그때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는 1990년대 초반 남편이 일본 출장을 갔다 돌아오면서 선물로 사온 캐논EOS 였다. 카메라면서 디지털 기능이 장착된 그때 당시 최신형 모델이었다. 남편은 진숙씨가 언젠가는 사진을 배울 것을 알고서 카메라를 선물했을까? 진숙씨는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사진은 예정돼 있던 일이란 생각을 사진을 배우면 배울수록 깨닫는다고 했다.
‘백주산보’는 이때의 시간과 추억이 새겨진 이름이다. 한낮에 산책하듯 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그것은 작품집으로 세상에 남게 됐다. 사실, 사진집을 낼 생각까지 하고 있지는 않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이기에 제주 이주 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의 한 카페에서 영화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찾아갔다. 그곳에서 서귀포시 안덕면에 작업실이 있는 어느 사진가와 연이 닿았는데 하루는 그가 백주산보를 찾았다. 한 포스터를 보고 서로가 깜짝 놀랐다. 2018년도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였다.
알고보니, 그는 이 포스터를 제작한 서민규 사진가였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카밀라 호소 도노소 감독의 영화 ‘노나’의 한 장면을 포스터화 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스틸을 포스터로 채택한 적이 없었다. 포스터에는 칠레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 사는 노년의 여성 노나가 빨간색 코트를 입은 뒷모습이 담겼다. 진숙씨는 이를 전주를 기억하는 소품으로 일부러 구매했다고 했다. 영화제가 진행될 즈음 그는 제주 이주를 결정했을 때였다. 그렇게 책방 한 켠에 걸어뒀는데 그것을 제작한 이와 만난 것이다.
방문한 김에 고진숙 책방지기의 사진을 더 살펴본 서민규 대표는 사진집 발간을 제안했다. 그렇게 진숙씨의 첫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진숙씨는 계속 전주에 살았다면 서민규 대표를 만날 일도 책이 발간됐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제주행을 결정하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포스터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에 서민규 대표와의 만남이 예정됐던 것이란 느낌이 든다고 했다.
삶이라는 것이 늘 같은 나날들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수한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그 선택들이 모여 지금을 만들었다. 그러니 평소에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영화와 사진을 좋아하는 진숙씨가 관련 일을 확장해 가는 과정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연들이 등장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가 늘 가슴에 품어왔던 대로 인연들이 닿았던 것이다. 예정된 인연, 예정된 미래는 결국 우리가 지금 이 어떤 생각와 방향성, 마음을 품고 있느냐에 달렸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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