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사진=요행)

참 바쁜 날이었다. 3시에 책방지기와 만나기로 했는데 까닥하다간 늦을 위기였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차를 몰아 목적지인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로 향했다. 다행히 약속 시간 전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니 나를 반겨 주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바다다. 

그날은 너무나 기세등등했던 동장군이 물러나고 모처럼 햇님이 나왔다. 쨍한 쪽빛의 바다에 햇살이 쏟아져 내렸고 해수면에 닿은 햇살은 영롱한 빛을 반짝이며 부서졌다. 5분도 안 되는 그 찰나의 바다를 보는 순간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던 급박했던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 바다를 떠올리면 지금도 나는 가빠진 숨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이 바다를 왕복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둔 곳에 책방이 하나 있다. 오래된 집을 개조한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부.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부. (사진=요행)

책방지기를 만나기 전 혼자 책방을 둘러볼 시간이 넉넉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루였을 곳이 메인서가였다. 이곳을 경계로 양옆에 방이 있는데 현관에서 왼편에 별다른 문이 없어서 들어가 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책상이 있고 캠핑용 의지가 두어 개가 책상을 등진 채 놓여 있었다. 캠핑용 의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무 모양의 벽면 서가와 LP플레이어. 주변에 있는 LP판을 이 기기를 이용해 들을 수 있었다. 플레이어 사용법이 친절하게 정리돼 있다. LP 듣기를 뒤로 미루고 우선, 책상에 앉아 보았다.

‘온 세계로 가는 우편엽서’라는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필기류와 제주 풍경을 담은 사진엽서가 준비돼 있었다. ‘엽서를 써 볼까.’ 나도 잠깐 고민했다. 뭔가 고해를 해야 할 것 만은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기류 옆으로 방명록이 있었는데 어떤 책방일지 궁금해 잠시 들춰보았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방명록.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방명록. (사진=요행)

“Life is wonderful! 길을 걷다 마주친 선물 같은 이곳. 파도소리, 바람, 책 냄새... 감사히 쉬어갑니다.”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느끼고 가요, 또 오고 싶어요. 요런 장소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흐린 듯 따듯한 제주.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한 시간이 머무는 책방. 제 시간도 이 책방과 함께 머물러 보고자 합니다. 고즈넉한 하루, 여기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생각하지 못한 행복감을 느끼고 깜짝 선물을 받은 듯한 곳이라는 말들이 방명록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위로를 받았다는 감사한 마음이 글과 그림들로 4권의 방명록에 채워져 있었다. 이 책방은 어떤 힘이 있길래 이렇듯 사람들은 고해를 하듯 방명록을 남겼을까? 잠시 후, 책방지기를 만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부.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부. (사진=요행)

올해로 쉰셋이라는 박성길 책방지기는 5년 전 제주에 정착한 이주민이다. 이전까지는 서울에 거주했다. 제주로 오기 전까지 그는 약 20년 동안 대학생을 대상으로 청년 리더십 교육을 했다. 성길씨는 수강생들에게 현실적 제약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꿈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라고 늘 강조했다. 현실의 어려움은 뛰어넘으면 되는 것, 그래야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라며 그들을 다독였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청년이던 때의 사회와 지금은 다른데 너무 자신의 기준에서 학생들을 채찍질한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백세 시대라는데 그럼 반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남은 생은 아름다운 제주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자신의 강의 내용이 현실적인 것이었는지 검증도 할 겸 말이다. 

성길씨는 처음부터 제주에서 책방을 운영할 계획을 했다. 이곳과 이웃한 곳에 또 하나의 책방이 있다. 그리고 곧, 세 번째 책방이 문을 열 예정이다. 그는 제주에 100개의 책방을 운영할 꿈을 가지고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메인서가.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메인서가. (사진=요행)

“지금도 제주에 책방이 적은 편은 아닌데 대표님이 운영하는 책방을 무려 100곳이나 만드신다고요? 왜요?” 

“제주니까 가능합니다. 제주는 섬 동서남북 어디나 멋져요. 마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법을 부리죠. 그런 순간에 좋은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요. 제주는 풍경만 멋진 곳이 아니라 인문학적 자산도 탁월한 공간이 되는 거예요. 책과 제주.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이 없어요.

제주 어디에서나 누구나 쉽게 책을 접하고 읽는 문화가 자리 잡힌다면 책을 읽기 위해 찾는 섬이 될 거예요. 그러면 이 멋진 풍경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가꾸고 싶겠죠. 이 제주에서 책을 읽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절로 제주 환경을 지키게 되는 거예요.”

“왜 하필 책방이에요?”

“책 속에 시간이 머물러 있어요. 고전문학을 예를 들면, 이 장르는 몇 세기에 걸쳐 세계인들이 인정한 명작들이잖아요. 고전문학이 사랑받는 이유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책이 주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책 한 권, 한 권에 감춰져 있는 보석 같은 시간을 누군가는 발견해서 가지고 가겠죠.”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 비치된 우편엽서. (사진=요행)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소재 무인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내 비치된 우편엽서. (사진=요행)

좋은 책을 엄선해 준비해 놓았으니 그 책을 취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선택은 독자의 몫이라면서도 성길씨는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글자를 익힌 후부터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는 성길씨. 그는 삶이 주는 힘든 여정들을 책 속의 지혜 덕에 인내하고 견디고 또한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했다. 책에 대한 철학이 누구보다 확고한 책방지기다. 

이곳은 지난해 7월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 약 4개월은 내부 공사에 힘을 쏟았다. 책방 내외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판자를 구해와 간이 의자와 책상을 만들고, 서가를 만들었다. 페인트칠, 도배, 바닥 작업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옛집이 켜켜이 쌓아 온 시간을 훼손하지 않고 아늑하면서 편리하게 공간을 배치했다. 옛 물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 곳이다. 성길씨와 비슷한 연배라면 고등학생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장치들이 곳곳에 있다. 

‘참된 위로의 공간’ 

성길씨가 목표로 삼은 인테리어 컨셉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가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으면 자기 고백을 하고 싶어진다. 감사함을 전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서럽거나 우울한 일들을 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 인생의 방향을 일러 줄, 삶의 지혜를 알려 줄 책을 만날 것 같은 기분. 

누군가의 방명록처럼 이 책방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 내 귓가에 그날의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쟁쟁하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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