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제주사람들은 이곳을 제주 섬의 끝 마을이라 부르고, 종달리의 상징인 지미봉을 ‘땅의 끝’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근거가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태종 16년(1416년)에 산남(山南; 제주에선 한라산 남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임) 지방 인구가 증가되고 처리 사무가 정의(旌義; 지금의 성읍지역)와 대정(大靜)의 2현(縣)을 신설할 때 종달리는 ‘제주목의 끝 마을, 즉 마지막 마을’로 ‘종달’이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제주의 마을 구좌읍 종달리 누리집

제주 본섬에서 ‘땅의 끝’을 상징하는 지미봉은 정상에 올라섰을 때 엄청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비고가 160m로 경사가 꽤 가파른 편인데 오르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풍경에 흠칫 놀란다.

사실 오를 때는 ‘도대체 얼마나 더 중력을 거슬러야 정상에 도착한단 말인가!’ 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걷는 것인지 기는 것인지에만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그러다 한숨을 돌리려 잠깐 멈추면 성산일출봉이 보이기 시작하고 성산일출봉 주변을 감싸는 파아란 바다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웃한 곳에 어쩜 저렇게 멋들어지게 형성될 수 있나 싶은 우도가 자태를 드러낼 준비를 한다. 

아직 감탄한 일은 더 있다. 조금 더 올라 다시금 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어랏? 누가 저렇게 멋지게 조각보를 만들어 놨지?’ 싶은 밭담과 밭이 보인다. 그 사이 우도는 ‘소가 드러누운 모습’을 완벽히 보여준다. 정상에 기어이 올라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더 힘을 낸다. 

정상에 서면 한라산을 호위하는 듯 겹겹이 들어선 오름들의 무리지은 모습에 마음이 뺏겼다가 겨울이면 새들의 숨결로 생기가 가득해지는 하도철새도래지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시원한 바람이 불면 중력을 거스른 자의 기쁨이 짜릿하게 몸을 휘감는다. 발아래 펼쳐진 파란 바다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우애 좋은 남매처럼 이웃해 있고 그 모습을 마주한 종달 마을엔 갈대밭과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가 재배되는 밭들이 보인다. 조그맣게 보여서 더욱 정감이 가는 집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있어서 더 눈에 띈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메인 서가엔 예술과 문학, 인문사회, 역사 등에 관한 책이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메인 서가엔 예술과 문학, 인문사회, 역사 등에 관한 책이 전시돼 있다. (사진=요행)

제주의 모든 마을이 특별하지만 나에게 종달리는 지미봉이 있어서 더욱 마음이 가는 곳이다. 이 마을의 매력을 나만 아는 게 아니다. 책방이 유독 몰려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 중 한 곳이 지미봉 아래 있다. 정원이 잘 가꿔진 오래된 집을 개조한 책방이자 북카페인 <카페 책자국>이다. 

지미봉의 매력은 주변의 모든 것을 조망하는 점에서 오는 시원함이다. 카페 책자국의 매력은 비밀의 정원에 초대받아 이끌린 듯 스미게 된다는 점이다. 정원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그래서 안에 있으면 순간 외부 세계가 차단되는 느낌이 든다. 비밀스럽고 고요한 장소로 순간 이동한 것처럼.

이곳이 책방이 되기 전에는 함박스테이크 가게와 프랑스 가정 요리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책방겸 북카페로 변신한 건 지난 2019년 6월이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내 송혜령.고승의 책방지기 그림이 걸려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내 송혜령.고승의 책방지기 그림이 걸려 있다  (사진=요행)

고승의, 송혜령 부부가 책방지기로 이들은 지난 2014년 제주로 이주했다. 처음엔 종달리 옆 마을인 하도리에서 카페를 3년 반 가량 운영했다. 그러다 본가에 길게 다녀와야 할 일이 있어 카페를 접었고,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기 6개월 전쯤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제주로 이주하기 전 승의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혜령씨는 방송작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2011년에 둘 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을 오가며 약 9개월 동안 세상 구경을 했다. 마침표는 제주에서 찍었다. 어떤 엄청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주가 주는 특유의 정감과 편안함에 두 사람은 마음이 동했다. 

하도에서 연 카페가 의외로 잘 되었던 터라 종달리에서도 카페를 열기로 했다. 부부집에 책이 많이 있으니 책이 있는 카페로 방향을 잡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부가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책을 선별해서 소개하고 팔아보자고 이야기가 발전됐다. 그렇게 책방이 탄생했다. 

“누구든 책을 읽다가 마음에 옮겨 적고 싶은 문장들을 만나는 날이 있죠. 어떤 책은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하고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게 하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책은 여행과도 닮아 있어요. 독서도, 여행도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일이니까요.”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p. 178

책방 ‘책자국’은 이런 연유에서 탄생했다. 위의 책엔 23곳의 동네책방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무려 아홉 곳이 제주 동네책방이다. 제주에 귀한 책방이 많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괜히 내가 다 뿌듯하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의 고승욱 책방지기.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의 고승욱 책방지기. (사진=요행)

고승의 책방지기는 ‘달팽이’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아내가 붙인 별명이다. 같은 책(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있다. 추려서 설명하면 고승의 책방지기는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성격이고, 송혜령 책방지기는 반대로 ‘뭐든 마음 먹은 일은 그 자리에서 빨리빨리 해치워야 하는’ 성향이라고 한다. 너무나 느긋한 성향의 남편에게 가끔 불만이 생길 터. 그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별명인 것이다. 어쩐지 이 책방을 열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해서 지은 건 아닐까? 책자국과 지날 때마다 자국을 남기는 달팽이! 참 절묘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비가 올라치면 달팽이가 보였다. 집요하다고 할 만큼 달팽이는 묵묵히 전진한다. 참 느리게. 하지만 그래서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달팽이의 진심이 전해진다. 기필코 목표한 바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마음 말이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그룹 패닉의 노래 ‘달팽이’도 이 조그맣지만 꿋꿋한 성향을 가진 동물의 이러한 속성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고, 지금도 그렇다. 

사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달팽이의 성향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달팽이 시절을 거치지 않은 적이 있을까. 학창시절은 학생이어서, 사회초년생은 초년생이어서. 승진을 하고 나이를 먹어도 사실 각자의 인생에서 우리는 꽤나 ‘달팽이’스럽다. 현실은 냉정하고 그래서 버거운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언젠간 가 닿을 나만의 바다를 꿈꾸며 힘을 내본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에서는 책방지기 부부 소유의 책을 빌려볼 수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에서는 책방지기 부부 소유의 책을 빌려볼 수 있다. (사진=요행)

이런 달팽이들이 긴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 책방이 아닐까. 책에는 삶도 있고, 사랑도 있고, 사람도 있고, 자연과 우주가 들어 있다. 온전히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치유의 힘이 있는데 책은 몰입의 시간을 가져다주면서 거기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달팽이 성향의 남편과 그의 아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길 책들을 모아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서가엔 역사, 인문사회과학을 선호하는 승의씨와 문학, 예술을 선호하는 혜령씨의 취향이 적절히 섞여 있다. 시대를 반영한 트렌디한 신간과 오래 두고 보면 좋을 책들 역시 눈에 띤다. 책을 선별하는데 있어서 부부가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전해진다. 

이번 칼럼은 책방을 연 부부의 마음이 담긴 글로 마무리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책을 읽기 싫어서가 아니라 ‘책의 진심’을 몰라서 책을 가까이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책방지기가 할 일은 책의 진심이 잘 드러나도록 매만지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책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앉히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꼭 보아주셨으면 하는 책에는 별도의 코멘트를 적어 꽂아두고, 달팽이 주인장(고승의 책방지기)과 상실점장(송혜령 책방지기)을(를) 사로잡은 좋은 책들이 더 많은 분들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방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p. 186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잘 가꿔진 정원 속 책방이다. (사진=요행)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카페 책자국'. 잘 가꿔진 정원 속 책방이다. (사진=요행)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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