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나무와 떨어진 동백꽃. (사진=송기남)
동백나무와 떨어진 동백꽃. (사진=송기남)

돔박은 동백이고 고장은 꽃의 제주말이다. 식물 분류학상으로는 차나무과이며 우리나라에는 제주에서부터 중남부 지방 아래로 자라는 온난대성 상록수이다. 전라남도 여수 앞바다에도 동백숲 군락지가 있지만 제주도에 돔박낭 숲은 그 규모가 세계 최대의 면적을 자랑한다.

서귀포시 남원읍 지역 중산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원동 서귀포 자연 휴양림까지 광활한 면적의 상록수림이 이어지는데 여기가 세계 최대 면적의 돔박낭 숲이다. 그리고 한라산 북동쪽에는 선흘 곶자왈 돔박낭 군락이 서귀포 지역에 이어 세계 제2의 동백숲을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 동백숲은 서귀포시와 제주시가 세계 제1면적과 세계 제2면적을 모두 가진 셈이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광령천이나 남서쪽의 안덕 계곡 등에도 동백이 자생하는 것으로 보아 제주에 목축 문화가 성하던 시절 산과 들판에 어디든지 자생하던 것이 불을 놓아 태워지며 중간중간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동백나무는 무거우면서 목질이 단단하다. 그러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덩드렁 마깨라고 하는 둥글고 두꺼운 나무 방망이를 만들었다. 덩드렁 마깨는 넓적한 돌판 위에 생약초를 올려놓고 두드려 즙을 낼 때나 신서란이나 짚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새끼를 꼴 때도 쓰이는 각 가정마다 있던 민구류다.

동백나무는 제주에서 암반 마깨라고 하는 다듬잇방망이를 만들어 다듬이질을 할 때도 쓴다. 암반 마깨는 풀먹인 옷을 다듬이질할 때뿐 아니라 제사 명절 때 가정집에서 떡을 하면서 떡판을 미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한창 피고 있는 동백꽃. (사진=송기남)
한창 피고 있는 동백꽃. (사진=송기남)

나의 외할아버지는 남제주군 중문면 중문리 1625번지 외가집 울타리 안에 동백나무를 심으셨다. 밑에서부터 두 갈래로 뻗어 올라간 동백나무에는 한겨울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통꽃을 따서 거꾸로 들고 쪽~ 쪽~ 빨면 꿀물이 입안으로 가득 쏟아지던 그 시절 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나의 어머니는 동백씨를 주워다가 기름을 짜 오셨다. 어머니는 돔박 지름이라 하였고 가끔씩 오일장에 가는 날과 명절 때면 가르마 가르고 빗어내린 머리에 돔박지름을 참빗에 묻혀 곱게 빚질하고는 뒤로 둘둘 말아 올려 비녀를 꽂으셨다.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재봉틀 기름으로도 돔박지름을 쓰셨다. 어머니는 솜에다가 돔박지름을 조금씩 묻혀서 재봉틀 틈새를 가끔씩 닦는 모습을 꼬마 시절에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명절 대목이 가까워지면 어머니는 바느질로 밤새는 경우도 있었다. 

못동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호롱불 하나를 천정에 걸어놓고는 등잔밑이 어두워 기름접시에 면실을 꼬아 심지를 만들고는 접시불 하나를 더 밝혀놓고 바느질을 하셨다. 이때 접시불로 쓰던 기름이 두 종류였는데 병에서 기름접시에 부으면 돔박지름이고 단지에서 숟가락으로 떠 놓으면 돼지기름이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베어진 모습. 성읍리 마을. (사진=송기남)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베어진 모습. 성읍리 마을. (사진=송기남)

동백기름은 그 쓰임새가 아주 다양하다. 여인들의 머리기름에서부터 촛불 대신 밤을 밝히는 등잔 기름뿐 아니라 만성 위장병에도 약으로 쓰임이 있는 훌륭한 재료였다.

동백은 동박새와 함께 화가들의 화폭에도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등장한다. 붉은 입술에 달콤한 꿀물을 물고 있는 동백꽃의 유혹 앞에 동박새는 넋을 잃고 빨려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매혹적인 모습에서 동지 섣달 정이월이면 화가들의 붓놀림이 바빠질 것이다. 밀원이 많은 식물 동백꽃에 꿀물은 양봉 농가의 벌들에게도 고급 양식이다.

겨울과 봄 사이 햇살 따사로운 날이면 동백꽃 흐드러진 곳에 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든다. 꿀벌들은 꿀물을 배가 터지도록 담아놓고 양쪽 뒷다리에는 노오란 꽃가루를 욕심껏 둘둘 말아 벌통 앞까지 가서는 몸이 무거워 툭툭 떨어지면서 기어가게 된다. 이런 장면들까지 관찰하다 보면 먹고 살려는 생명들의 피나는 노력이 경이롭기도 하다.

잘려나간 나무. 지난 14일 탐방 중. (사진=송기남)
잘려나간 나무. 지난 14일 탐방 중. (사진=송기남)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는 조선시대 500년간 정의현 현청이 있었던 마을이 1980년대 초에 문화 마을로 복원하여 옛 모습의 일부를 살려오고 있었다. 40여 년 전 복원된 초가마을에는 조선시대부터 키우던 나무들과 복원 후에 심어진 나무들이 어우러져 4계절 꽃피고 새우는 정겨운 마을이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울타리마다 커다란 늙으신 폭나무와 돔박낭들이 어우러져 붉은 꽃을 피운다. 

그런데 지난 1월 11일 어느 올레를 지나다 보니 100살도 훨씬 넘어 보이는 늙으신 돔방낭 하루방이 토막난 채 쓰러져 있다. 마을의 흥망과 아픔을 지켜보며 정겨운 마을의 희망을 품고 살아오신 돔박낭 어르신을 이렇게 처참하게 베어진 모습은 탐방객으로 하여금 가슴을 쓰리게 한다.

우리나라 본토 남부지방에는 봄이 올 때쯤 피는 꽃이지만 제주에서는 12월부터 피고 지면서 하얀 눈 위에 붉은 동백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겨울 내내 봄까지 이어간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군정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정에 제주 도민들이 되찾으려던 4월 혁명의 꽃으로 상징되는 돔박 고장은 한겨울 칼바람에도 진녹색의 잎을 떨구지 않고 붉은 꽃 곱게 피었다가 깨끗이 이슬처럼 떨어지는 꽃이다. 그러므로 제주 도민들은 돔박 고장을 4·3 항쟁을 상징하는 목숨 같은 꽃으로 지정한 것이다.

송기남.

송기남.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출생
제민일보 서귀포 지국장 역임
서귀포시 농민회 초대 부회장역임
전농 조천읍 농민회 회장 역임
제주 새별문학회 회원
제주 자연과 역사 생태해설사로 활동중
제주 자연 식물이야기 현재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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