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5백년을 유지한 토대가 19페이지에 밖에 되지 않는 『농사직설(農事直設)』 때문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믿을까?

세종은 1428년(세종 10년) 6여 년간 계속된 가뭄과 흉작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목도하고, 10일간 수저를 들지 못한다. 왕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농업혁신에 국가역량을 집중하기로 결단하고,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의 감사들에게 농사 잘 짓는 노농(老農)들의 경험과 지혜를 조사하여 보고토록 한다. 그리고 정초와 변효문을 시켜 그 보고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완성한다.

농사직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농사직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농사직설』의 본문은 10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항은 씨앗준비, 2항은 땅 갈기에 대한 내용인데, 지금으로 치면 종자와 토양 관리에 대한 총론이다. 3항부터 10항까지는 마, 벼, 조, 기장, 콩·팥·녹두, 보리·밀, 참깨, 메밀 등의 재배법을 기술한 각론이다. 그리고 자음의(子音義)와 정초의 서문이 붙어있다.

『농사직설』의 특징은 첫째, 마를 빼면 먹거리 작물만을 다루었다. 그만큼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농업생산력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종자·토양관리, 작물재배법을 표준화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셋째, 양맥(보리, 밀)을 중심으로 한 돌려짓기를 소개하였다. 심경, 객토, 인분·우마분·재거름 시비 등으로 지력을 증진하는  방법들을 소개하여 그때까지 당연시하던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할 수 있었다. 넷째, 조선의 삼남지방에서 행해지는 논농사에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등 중국 화북지방의 밭농사 중심으로 기술된 『농상집요』에서 벗어나 조선풍토에 맞는 조선의 농법들을 기술하였다.

『농사직설』은 1430년 간행되어 전국 각 고을의 감사와 중앙의 2품 이상 관리들에게 배포되었고, 1437년에도 갑인자(1434년에 왕명으로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 인쇄되어 각 고을에 내려 보내 권농의 기본서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고려 말에 비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4배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개간 농지도 크게 늘어 농지면적도 2.4배 증가하였다. 인구 또한 1.8배 증가하였고, 세수는 100% 증가하였으며, 백성들의 조세 부담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농사직설』은 1492년(성종23년), 1656년(효종7년), 1686년(숙종12년) 등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 조선후기까지 농서(農書)의 기초로 활용되었다.

조선경제는 농업이 바탕이었고, 백성들의 삶은 농업생산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이를 ‘농자천하지대본’으로 표현하였다. 세종은 『권농교본(勸農敎文)』을 통해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의 근원으로 왕정에서 제일 먼저 할 바이다”라고 천명하였다.  

따라서 왕들은 권농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지방관의 가장 큰 임무는 때에 맞추어 농사를 독려하고, 농사 형편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권농을 위해서는 농사의 때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혼천의는 정확한 절기를 알기 위해, 칠정산은 중국이 아닌 조선에 맞는 농사의 때를 알려주기 위해 발명되고 편찬되었다. 갑인자도 『농사직설』을 많이 찍어내기 위해 발명되었다.

한글도 『농사직설』에 빚을 지고 있다. “풍토가 다르면 농업도 다르다.”라는 ‘풍토부동론(風土不同論)’은 “나랏 말쏘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소못디 아니홀쒜”라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로 이어졌다. 『농사직설』은 노농들의 지식을 수집하여 정리한 기술서다. 그런데 노농들의 말을 한자로는 온전히 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품종명을 다룰 때 ‘향명(鄕名)’이라 하여 이두어로 보충하고, 글자의 발음과 뜻이라는 용어해설집인 자음의가 붙었던 것이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농사직설』을 편찬하면서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백성들과 완벽한 소통을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농사직설』은 지금으로 보면 현장의 정보인 빅데이터를 수집·분류·축척하고 표준화하여 공유한 유튜브나 다름없다. 그리고 조선은 이 유튜브로 농업생산력을 혁신적으로 제고하여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넘쳐나는 세수로 국가기틀을 마련하고 문화강국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국의 농업비중은 저곡가정책과 수입개방 등으로 계속 줄어들어 GDP 중 차지하는 비율이 1970년 36.5%에서 작년 1.8%까지 떨어졌다. 또한 농업은 기후변화에 따른 태풍·가뭄·홍수·저온·고온·대설 등의 기상재해를 가장 앞서서 경험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농민독본』에서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기후위기를 풀 열쇠는 농림업이 잡고 있다.”는 말을 더하고 싶다. 향후 농업이 식량안보 역할을 넘어 기후와 환경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하는 ‘신 농사직설’ 시대를 꿈꾼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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