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자료사진. (사진=플리커닷컴)
고구마 자료사진. (사진=플리커닷컴)

겨울 초입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잉걸불에서 물고구마를 꺼내 입으로 손을 후후 불어가며 감저 껍질을 벗겨주던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제주에서 고구마는 감저(甘藷)라고 한다. 1938년 총독부에서 펴낸 제주도세요람에서 “감저는 제주도의 풍토에 가장 적합한 작물이자 농가대용식량이다.”라는 기록처럼 제주도에서 고구마는 보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고구마가 제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764년(영조 40년)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쓰시마섬에서  구해온 씨 고구마를 동래지방 및 제주도에 심도록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부터 제주에서 재배되었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고구마는 제주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구황작물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가 총독부가 1937년 제주지역 ‘고구마증산장려계획’을 수립하고 고구마 재배에 제주관민을 총동원하면서 제주는 가공용 고구마의 주산지가 되었다. 일제가 고구마 증산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일본에게는 동력기관의 연료로 쓰이는 알코올의 확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고구마 주정에서 무수알코올을 뽑아내기 위해 1938년 ‘주정공장은 제주 발전의 생명선으로 도외에 공장을 두면 원료공급을 거절한다.’는 유도된 도민결의를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1939년 대정면을 시작으로 감저공장(고구마전분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생산된 고구마의 40% 이상은 주정용 절간고구마(얇게 썰어 말린 고구마)로 공출되었고, 나머지는 도내 전분공장에 공급하거나 도내 소비에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의 고구마 재배면적은 1913년 600ha에서 1938년 7357ha로 12배 이상 증가하였다. 

해방 후에도 고구마 가공 산업은 계속 발전하여 1960년대까지 제주도 세원의 30% 이상이 감저공장에서 나올 만큼 고구마는 보리와 함께 제주를 대표하는 농작물이었다. 4·3 당시 민간인을 수용했던 곳이 건입동 주정공장이고,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예비검속자를 수감했던 곳이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였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4·3 당시 제주 주정공장. (자료사진=4·3아카이브)
4·3 당시 제주 주정공장. (자료사진=4·3아카이브)

1970년도의 작목별 재배면적을 보면 고구마가 1만2178ha로, 보리 2만5032ha에 이어 2위였으며 전국 재배면적의 13.8%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유채가 1만440ha이며, 감귤은 5002ha, 채소류는 2004ha이었다. 1970년 중반까지도 감귤 주산지인 남원읍과 서귀포 동지역은 대정·한림·애월읍 등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였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수입산 전분이 들어오고, 전국을 휩쓸던 고구마전분으로 만들었던 제주산 당면이 중국산 당면으로 대체되면서 그 많던 고구마 밭들은 감귤원과 당근, 마늘, 양파, 무, 브로콜리 등 채소밭으로 바뀌었다. 쓸모를 상실한 감저공장들 또한 하나 둘 사라지다가 ‘앤트러사이트’ 같이 일부는 카페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2020년 11월 15일자 일본농업신문에 ‘고구마 베니하루카(べにはるか) 무단유통 한국에서 재배면적 40%나 늘어나 수출경쟁에 우려’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농민이 2010년 일본에서 견학하면서 들여온 베니루카가 해남군농업기술센터에서 무균 배양하여 ‘해남1호’라는 이름으로 보급하였고, 당도가 무려 27브릭스에 이르다보니 달수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베니하루카=해남1호=달수는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UPOV)에서 정한 유효기간인 4년 이내에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품종등록이 되지 않아 법적 분쟁의 여지는 없다.   

농촌진흥청에서는 국내 고구마 품종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기능성과 재배 안전성이 우수한 고구마 품종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국내 고구마 품종의 재배면적 비율이 2016년 14.9%에서 2020년 37.1%로 증가하였고, 호박 고구마 ‘호감미’는 경기도 여주, 베타카로틴 함량이 높은 ‘풍원미’는 충청도 논산, 밤고구마인 ‘진율미’는 해남의 지역 특화품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구마 밭. (사진=제주투데이DB)
고구마 밭. (사진=제주투데이DB)

고구마의 본향이었던 제주에서는 2020년이 되어서야 서부농업기술센터와 고산농협이 협력하여 진율미, 호감미, 풍원미 3개 품종의 지역 적응성 실험을 거쳐 제주지역에 가장 알맞은 진율미 보급에 나서고 있다. 금년 제주도의 고구마 재배면적은 126ha에 불과하다.

필자가 고구마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고구마의 식품학적 가치를 설파하기 위함도, 뻬떼기와 감저범벅(고구마를 삶다가 메밀가루를 풀어 버무린 음식)을 먹고, 감저눌(땅에 구덩이를 파고 짚을 깔아 씨 고구마를 넣은 후 그 위에 띠로 만든 ‘노람지’를 덮고 그 위에 또 모자처럼 ‘주쟁이’를 씌운 고구마 저장소)에서 고구마 서리하던 추억을 되새김질하기 위함도 아니다.

제주에서 고구마 재배면적의 감소는 화학비료·합성농약 사용량의 증가와 궤를 같이한다. 고구마는 다른 작물이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재해에도 강하여 화학비료와 합성농약을 덜 써도 되는 작물이다. 따라서 보리-고구마 작부체계에서는 비료와 농약에 의한 토양·지하수 오염과 안전성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또한 보리-고구마·콩 작부체계가 감귤, 월동채소 등 단일작부 체계로 바뀌면서 먹거리 지역순환 시스템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제주는 고구마를 비롯하여 조, 팥, 녹두, 밭벼, 메밀 등의 최고의 생산 적지이면서도 외국산이나 육지산을 구입해 먹고 있다.  

따라서 날로 진행되는 토양·수질오염을 방지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료와 물 요구량이 많은 채소 위주의 작부체제에서 벗어나 보리·유채-고구마·콩조, 팥, 녹두, 밭벼, 메밀 등 전통적인 작부체제를 부활시킬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잎들이 찬란하게 물들었다가 바래지며 소멸된다. 잎을 떨구어낸 나무가 고갱이로 남아 오히려 명료하다. 번잡한 것을 떨구고 단순명료하게 살자고 하면 철없는 소리일까?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격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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