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관측 이래로 가장 많은 열대야 일수 52일을 기록한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여전히 한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그늘을 찾게 되지만 새벽에는 찬 공기에 이불을 찾게 된다. 벌초도 끝냈고, 배추 모종도 심었으니 추석이 바로 코앞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세 번째 추석이다. 올 추석은 사정이 나아져 가족들과 차례 음식을 먹으며 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각시님이 추석 선물 때문에 고민이 된다고 한다. 합리적인 가격에 받는 분이 기뻐할 의미 있는 선물을 고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는 입을 구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 음식을 나누어 먹는 문화가 발전하였다. 하지만 개인 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은 없었다. 필자가 선물을 처음 받은 것도 초등학교 5학년 추석 무렵이었다. 부산에서 옷가게를 하다 접고 내려온 이모가 길표 튜브양말을 추석 선물로 주었다. 형들의 양말을 기워 신었던 필자는 그날 밤 목이 긴 줄무늬 양말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 그렇게 기쁜 추석 선물을 받거나 드릴 수 있을까?
명절선물은 경제 사정과 시대 분위기에 따라 유행을 달리해왔다. 명절선물이 생겨난 1950년대는 전쟁 직후의 배고픈 시대여서 쌀, 계란 등 농산물이, 제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60년대에는 통조림·설탕·밀가루 등 식료품이 인기가 높았다.
70년대∼80년대에는 간장·식용유·조미료 등 생필품뿐만 아니라 화장품·넥타이·과자 등 취향을 반영한 선물 세트가 유행했다. 90년대에는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1인당 국민총소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1987년 3510달러 → 1996년 1만3138달러) 인삼·송이버섯·한우·굴비 등의 지역특산물이 규격화되어 고가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97년에 닥친 IMF 경제위기는 굴비나 양주 등 고가의 선물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참치·조미김·치약·양말 등 실속을 챙긴 저가의 맞춤형 선물 세트를 유행시켰다.
2만달러를 넘어선 1인당 국민총소득과 참살이 붐은 명절선물의 다양화를 가져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 명절선물은 한우·굴비세트 등 기존의 고가품에서부터 홍삼·오메가3와 같은 건강기능식품, 문배술·이강주 같은 전통주와 와인 등의 주류, 2016년 ‘김영란법’ 이후에 자리 잡은 5만원 이하의 알뜰 선물 세트까지 다양해졌다. 소득수준과 문화계층 차이가 심화함에 따라 추석선물도 분화됐다.
2020년 코로나 이후 비대면 접촉이 일상화되면서 선물을 받는 사람이 원하는 상품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모바일 상품권이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호텔이용권이나 전통주 구독권 같은 서비스이용권까지 선물이 범위가 확장되어가고 있다.
명절선물은 국민들로부터 ‘고마움을 전하는 마음의 표시인지 청탁을 위한 뇌물인지’하는 의심을 계속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선물가액도 청탁금지법시행령에서 정해져 따르도록 하고 있다. 공직자에게 선물은 5만원이 한도이지만, 농수산물인 경우는 소비촉진을 위해 10만원까지 가능하도록 하였고, 추석과 설 명절에는 20만원까지 허용하고 있다. 선물 가격을 법에서 정할 만큼 명절선물이 보편화되었다는 말이다.
추석은 가족들이 모여들어 우리를 있게 한 부모와 조상 및 풍성한 결실로 우리를 먹여 살리는 자연에 감사하는 의례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가 시공간적으로 끝없이 연결된 유기적 존재임을 인식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데 추석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금번에 마련하는 추석 선물에도 이러한 의미가 담기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경제권을 쥔 각시님에게 추석 선물 고르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첫째, 고향의 맛과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선물을 고를 것. 둘째, 유기적으로 생산된 환경 친화적인 제품을 고를 것. 셋째, 이왕이면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제주산을 고를 것. 넷째, 믿을 수 있고 안전성이 보장된 국가인증품을 고를 것. 다섯째 사탕수수부산물이나 폐지로 만든 재생지나 정 안 되면 종이로 포장된 제품을 고를 것.
각시님이 기준에 맞는 품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사리·표고버섯·녹차·무말랭이·단호박·감귤·꿀 등의 농산물과 된장 등의 전통식품 그리고 오메기술 등 전통주밖에 없다고 했다. 또 그 중에서 환경을 생각하고 국가가 인증한 제품을 고르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만큼 어렵다고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이런 어려운 과업이 어디를 가나 욕을 먹는 농업공무원 부인이 치러야 하는 죗값이 아니겠냐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필자는 미소 띤 각시 얼굴이 제주레몬보다도 상큼해 보인다며 원산지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사람을 앞설 수는 없다. 최고의 추석 선물은 아이들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부모님 댁을 찾아뵙는 것이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관련기사
- [말랑농업]양돈과 청정 제주는 공존할 수 있을까
- [말랑농업]밀과 콩을 재배하는 이유는?
- [말랑농업]맥주예찬
- [말랑농업]개천용보다는 잡종
- [말랑농업]밭보다 씨가 중하다
- [말랑농업]위선과 산수국
- [말랑농업]‘누굴 뽑을까?’ 식물의 생존전략에서 배우다
- [말랑농업]메마른 가슴을 선홍빛으로 물들이다
- [말랑농업]기후위기는 왜 불평등한가
- [말랑농업]개민들레에 관한 단상
- [말랑농업]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 [말랑농업]밥의 위상이 흔들린다
- [말랑농업]꿀벌난초를 걸러내는 투표
- [말랑농업]치아를 뽑으며
- [말랑농업]샛절 드는 날
- [말랑농업]청년들은 왜 투자에 목을 매는가
- [말랑농업]청년농은 왜 농촌을 떠나는가
- [말랑농업]채식 식탁이 가져올 변화
- [말랑농업]예쁘고 매끈한 감귤만 찾는 당신에게
- [말랑농업]고구마에 대한 단상
- [말랑농업]제주바람이 키운 콩으로 제주할망이 만든 된장
- [말랑농업]샴페인과 지리적 표시제
- [말랑농업] 농약 안 쓰면 친환경농산물일까?
- [말랑농업]딸에게 가지를 먹이는 세 가지 방법
- [말랑농업]추석에는 양애탕쉬
- [말랑농업]어둠 속에서 빛나는 감자
- [말랑농업]‘설국열차’, 맬서스의 인구론을 비판하다
- [말랑농업]입맛 없는 여름철엔 꽁보리밥과 노각냉국
- [말랑농업]시원하고 달달한 그 이름, ‘풋귤’
- [말랑농업]농촌체험이 바캉스가 된다?
- [말랑농업]지렁이와 도시화
- [말랑농업] 조선 500년을 유지하게 한 책
- [말랑농업]밥 한 끼로 시작되는 세상의 변화
- [말랑농업]파랑, 분홍, 하양… 산수국 색의 비밀
- [말랑농업]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 [말랑농업]숫자로 농업을 읽는다
- [말랑농업]두부예찬
- [말랑농업]녹색이 지면 봄날도 간다
- [말랑농업]해마다 반복하는 마늘 농가 일손 부족 현상, 해결책은?
- [말랑농업]쑥을 캔다
- [말랑농업]제주서 농사짓는 청년 부부의 고민
- [말랑농업]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 [말랑농업]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말랑농업]“아빠, 보리빵이 맛있다구요?”
- [말랑농업]1.5℃, 인류 생존의 갈림길
- [말랑농업]고사리를 꺾으며 농지개혁을 꿈꾼다
- [말랑농업]소리 없는 전쟁, 씨앗 전쟁
- [말랑농업]태권브이가 마징가 제트를 이기려면
- [말랑농업]봄빛 머금은 꿩마농 향기가 입 안 가득
- [말랑농업]노란 바나나 뒤에 숨은 검은 그림자
- [말랑농업]“나는 못난이 유기농 당근을 지지합니다”
- [말랑농업]꽃으로 김치를 담그다
- [말랑농업]설 제사상에 대한 단상
- [말랑농업]오메기떡에는 오메기가 없다?
- [말랑농업]딸과 빙떡을 먹으며
- [말랑농업]눈 내리는 날엔 콩국 한 그릇
- [말랑농업]배추 모종을 심으며
- [말랑농업]오영훈 도정, 그린워싱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 [말랑농업]‘월정사 가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 [말랑농업]양파지를 담그며
- [말랑농업]단풍, 생명을 잇기 위한 몸부림
- [말랑농업]경자유전 원칙은 어디로…
- [말랑농업]제주 음식에서 배우는 지속가능한 농식품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