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사진=픽사베이)
밀밭(사진=픽사베이)

해리 포터Harry Potter의 potter는 도자기공,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einstein은 벽돌공, 리즈 테일러Liz Taylor의 taylor는 재단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도자기공이 마법을 부리고, 벽돌공이 상대성이론을 가르치며, 재단사가 보라 빛 눈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유쾌하다. 상상은 Farmer 가문이 밀을 수확하면, Miller 집안이 방아를 돌려 밀가루로 만들고, Baker 가문이 그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성씨를 통해서도 밀이 서양의 제1주식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밀은 쌀만큼이나 중요한 곡물이 되었다. 2021년 우리나라 밀 수입량은 433만톤(식용  250+사료용 183)으로 쌀 소비량[359만톤(밥용 294+가공용 65)]을 넘어섰다.

2021년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은 35.7kg으로 전년보다 4.0% 늘었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량은 56.9kg으로 1.4% 줄었다. 밀가루 소비량은 거의 변하지 않지만 쌀 소비량은 매년 3〜1.4% 줄어든다. 젊은이들은 쌀밥보다는 밀가루 가공식품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런 경향이 바뀌지 않으면 밀이 쌀을 제치고 제1주식 자리를 차지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  

시장에서 국내산 밀가루를 찾는 것은 인도에서 김종욱 찾는 것보다 힘들다. 밀가루 포장지에 표시된 밀의 원산지는 하나같이 미국·호주·캐나다로 되어 있다. 밀은 오곡에 들어가지 않는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라는 동요의 가사는 거짓말이 된지 오래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밀을 외국 작물로 잘못 알고 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의 밀 정부비축 매입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의 밀 정부비축 매입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우리나라의 밀 역사는 BC 200년까지 올라간다. 연대가 BC 200∼100년으로 밝혀진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지에서 밀이 발견되었다. 경주의 반월성과 부여의 부소산 군량고에서도 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밀이 재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상들은 국수와 누룩을 만들기 위해서 밀을 재배했다. 『농가월령가』 6월령에 나오는 “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베어내고,......밀 갈아 국수하여 사당에 먼저 올리고....... 밀기울 한데 모아, 누룩을 만들어라.”는 가사가 이를 말해준다. 박목월 시인이 밀밭 길에서 술 익는 마을을 연상한 것도 밀로 누룩을 만드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종학자 노먼 볼로그 박사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소노라F-64’(키가 작고 일찍 익는 다수확 밀 품종으로 제3세계의 기아 해결에 공헌함)의 단간(短幹)·조숙성(早熟性) 유전적 특성은 우리 토종종자 ‘앉은뱅이밀’에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에 따르면 1933년 우리나라의 밀 생산량은 28만8천톤이었다.

이와 같이 재배역사, 관련 문화, 종자, 생산량 등을 볼 때 밀은 우리민족과 애환을 같이 한 우리나라 작물임이 분명하다.  

외국산 밀이 우리나라에 대량으로 들어온 것은 1954년 「미국 상호안전보장법(Matural Security Act of 1951)」 402조와 「미국 농산물교역발전 및 원조법(Agricultural Trade Development and Assistance Act of 1954. 보통 PL480호로 불린다)」이 시행되면서부터였다. MSA 402조는 원조수혜국이 원조액의 일정비율 이상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하도록 한 규정이다. PL480호는 ‘평화를 위한 식량’이라는 기치를 걸고 최빈국에게 미국이 잉여농산물을 원조하고, 그 원조를 받은 국가는 원조물자 판매액으로 미국의 군수물자를 구입하게 만든 법이다. 따라서 태평양에 버려질 운명이었던 밀, 원면 등의 미국 농산물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심각한 식량사정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쌀 가격의 6분의 1에 불과한 밀가루를 비롯한 잉여농산물의 대량유입은 국내농산물 가격을 폭락시켜 밀, 면화 등의 생산 기반을 붕괴시키며,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미국의 원조 농산물은 농촌의 노동력을 도시로 유입하고 노동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수행하여 저곡가-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조 농산물은 삼백(제분·제당·면방직)산업의 발전도 가져왔다. 이 때 정치권과 결탁하여 원조물자를 독점 가공·판매했던 소수의 기업들이 재벌로 등장하였다. 삼성도 밀가루 가격조작과 세금포탈로 100억원을 챙기는 등 하얀 가루에서 나온 검은 부로 대기업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1970년대에 범국가적으로 이루어졌던 분식장려운동은 미국산 밀에 대한 의존을 더욱 심화시켰다.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어용지식인들은 쌀밥 중심의 식단을 폄하하며, 혼·분식 식단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빵, 국수, 수제비, 떡볶이, 라면 등 분식이 일상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설렁탕에 국수가 말아 나오는 것도 그 시대의 유산이다. 이러다보니 밀가루 1인당 연간 소비량이 1965년 13.8kg에서 1980년 29.4kg으로 증가하였다.  

밀가루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지자 우리나라는 ‘밀의 덫’에 빠져 더 많은 밀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밀 수입이 자유화되고, 1984년 정부의 밀 수매제도가 폐지되자 2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밀농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1990년 경남 고성군 두호마을에서 우리 밀로 만든 국수를 시식하는 행사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1991년 16만여 명의 소비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발족되었고, 1996년에는 2787ha의 면적에서 1만932톤의 우리 밀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8년 IMF가 닥치자 외국산과의 가격차를 견디지 못한 운동본부는 파산하였다. 이후 우리 밀은 2019년 「밀 산업 육성법」이 제정될 때까지 식량자급운동의 상징으로만 명맥을 유지해 왔다. 

2020년 11월 정부는 「밀 산업 육성법」에 근거해 낙후된 밀 생산기반 확충, 품질고급화, 비축물량 확대, 소비시장 확보 등으로 밀 자급률을 2025년까지 5% 올린다는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힘입어 올해 밀 재배면적은 8259ha로 2021년 6224ha보다 32.7% 증가하였다. 제주에서도 올해 처음으로 작년에 한림읍 금악·봉성리에 60ha규모로 조성된 국산 밀 생산 단지 등에서 생산된 밀 110톤이 농수산물유통공사를 통해 비축수매 되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 밀 정부비축 매입 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 밀 정부비축 매입 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하지만 소비처를 찾지 못한 국산 밀은 20년도 재고가 여전히 창고에 쌓여 있다. 올해 정부가 비축 매입하는 1만7천톤을 합하면 그 재고량은 더 늘어난다.  우리 밀 소비가 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가격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균일하지 못한 품질도 한몫한다. 올해 정부비축 밀 매입가격은 kg당 975원이다. 이 가격은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금년 3월의 수입 밀 가격과 비교해도 2배가 비싸다. 국제 밀 가격이 폭등하기 전에는 3∼4배 비쌌었다. 품질 또한 소규모 농가별로 제각각 재배하다보니 대규모로 생산하는 외국산에 비해 균일하지 못하여 가공성이 떨어진다.  

국제 밀 가격의 급격한 상승도 우리 밀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소비자들은 ‘빵·누들 플레이션’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아우성을 치지만 정작 구매할 때는 외국산 밀가루로 만든 상품을 선호한다. 여전히 우리 밀로 만든 상품이 비싸기 때문이다.

지난 7월 5일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하반기 밀가루가격을 동결하거나 수입가격 상승분의 10% 범위에서 밀가루가격을 인상한 제분업체에게 수입가격 상승분의 70%을 지원하는 밀가루 가격 안정대책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이 사업의 예산은 추경으로 확보한 546억원이다. 이는  올해 『밀산업 육성법』에 따라 투입하는 예산 238억원의 2.3배가 된다. 미래의 물가를 좌우할 밀 자급보다는 지금의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정책의 우선순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7번째의 곡물 수입국으로 매년 평균 밀 360만톤, 옥수수 850만톤, 콩 120만톤 등 1,550만톤의 곡물을 수입한다. 이 물량은 국내 곡물 수요량의 70%가 넘고, 쌀 소비량의 4배가 넘는다.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집계한 2020년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19.3%다.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특히 밀과 옥수수, 두류의 자급률(밀 0.8%, 옥수수 0.7%, 두류 7.5%)은 현저히 떨어진다. 곡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소고기는 63.2%,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27.2%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들 가축이 먹는 사료의 원료도 90% 이상을 수입한다. 그러다 보니 식량자급률은 45.3%에 불과하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 밀 정부비축 매입 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제주지원 밀 정부비축 매입 검사 현장(사진=고기협 제공)

지난 7월 10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민간기업의 글로벌 곡물 인프라 인수 시에는 장기 1.5%의 저리로 정부자금을 빌려주겠다.”며 “세계 29개국이 식량수출을 제한하는 등 식량수급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사오지 못해 식량주권이 흔들리는 일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겠다.”고 말했다.

세계 곡물시장의 75%를 장악한 곡물메이저인 ‘ABCD(ADM, Bunge, Cargill, LDC)’와 경쟁할 수 있는 곡물엘리베이터(곡물 저장·운송 인프라)를 갖춘 우리나라 기업을 육성하여 식량수급 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말이다. 이 발언에는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식량을 수입해서  먹는 것이 경제적이고, 농민을 앞세우는 식량자급보다는 기업을 통한 식량조달의 안전성 확보가 우선이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식량작물을 재배할 유인이 거의 없어서 식량자급률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이 마땅치 않다. 따라서 식량위기에 대응하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우리나라는 식량을 재배할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2021년 우리나라 경지면적은 154만7천ha다. 이마저도 매년 0.9〜1.5%씩 줄어들고 있다.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제1요인인 국민1인당 경지면적을 보면 한국은 0.03ha(300㎡)로, 일본의 2/3, 미국의 1/22, 프랑스의 1/10에 불과하다. 생산성과 품질을 좌우하는 영농규모인 경영체당 경지면적도 한국은 1.1ha로 일본의 2/5, 미국의 1/163, 프랑스의 1/58에 불과하다.

식량을 재배할 농업인구 또한 감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령화되고 있다. 2021년 기준 농가인구는 221만5498명으로 전체 인구의 4.3%에 불과하다. 경영주가 60세 이상인 농가가 77.3%을 차지하며, 농가경영주 평균연령도 67.2세이다. 특히 향후 우리나라 식량뿐만 아니라 농업을 책임질 40세 미만 경영주는 8000명으로 전체 농가수의 0.8%밖에 되지 않는다.

식량작물을 재배할 경제적 유인도 거의 없다. 2020년 기준 작물별 10a당 순소득을 보면 논벼는 73만원, 논벼를 제외한 식량작물은 85만원으로 시설과수 1036만원, 시설채소 707만원은 말할 것도 없고 노지채소 199만원, 노지과수 327만원과 비교해도 1/2이 되지 않는다. 식량작물 재배농가들도 여건만 되면 그나마 소득이 더 높은 다른 작물로 전환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외국산 농산물로 지켜지는 밥상의 풍족함이 그대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백년 만에 한두 번 오던 기상이변이 매년 발생하고 있다. 가뭄과 폭염, 한파와 폭설, 홍수와 태풍 등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상재해는 생산량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농산물 수급불안을 야기한다. 기후온난화는 사막화, 재배 적지의 북상, 병해충의 만연을 초래하여 농지를 감소시키고 생산성을 저하시키면서 곡물생산량의 감축을 가져온다.

자원고갈에 따른 고유가 및 원자재의 가격상승은 비료·농약 등 농자재 가격의 상승을 이끌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식량작물 재배를 포기하게 만든다.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정책은 곡물의 바이오 에너지화를 촉진시킨다. 신흥경제국의 고기섭취율 증가는 곡물재배포를 사료포로 전환시킨다. 여기에 더해 전쟁과 투기자본은 곡물시장의 안정성을 훼손한다. 이러한 위험요인들이 결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되면 전 세계적인 식량대란이 찾아올 수 있다.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외로 식량을 팔 수 있는 여력을 지닌 나라는 많지가 않다. 식량자급률이 100%로 넘는 국가는 15%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국가들은 대부분 밀, 콩, 옥수수를 함께 수출하는 국가이다. 우리가 먹는 밀은 대부분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수입한다. 콩도 미국과 캐나다에서 80% 이상을 수입한다. 식량을 조달해올 수 있는 국가가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공급망 다변화와 비축물량 확대로 식량수급 안전성을 확보하는 식량안보강화 정책과 더불어 식량자급률을 원천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범국가적인 생산·소비 여건조성 정책을 마련하여 추진해야 한다. 지금보다 식량 자급률이 더 떨어지면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촌은 완전히 붕괴되어 식량주권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식량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식량주권을 잃은 나라는 정치·경제적 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답게 사는 인간의 기본권마저 보장받지 못한다. 사람은 먹지 못하면 죽는다.

온 평생을 농사만 지어온 어머님에게 “몸을 축내면서 돈 안 되는 짓거리만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필자가 콩을 심었고, 그 뒷그루에 밀을 재배하려는 이유이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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