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배추 모종을 다시 심었다. 태풍 힌남노에 얼 먹은 배추들이 시들시들하다가 축 늘어졌기 때문이다. 75㎝ 너비의 이랑에 줄 간격 50㎝, 포기 간격 50㎝로 해서 60여 포기를 심었다. 각시가 배게(일정한 면적에 많은 작물을 심는 것;편집자) 심으면 면적도 덜 차지하고 잡초도 덜 날 텐데 왜 성글게 심느냐고 했다.
너무 촘촘하게 심으면 웃자라 잎줄기가 연약해지고, 병충해도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작물을 재배할 때는 작물 사이에 적정거리를 확보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적정거리는 작물 고유의 부피·크기, 생육 특성 뿐만 아니라 품종, 토양비옥도, 파종·수확시기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재배학에서는 작물체 간 심는 거리를 ‘재식거리’라고 하고, ‘줄 간격(絛間)×포기 간격(株間)’으로 표현하여 작물에 따른 재식거리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한자로 ‘사람(人)’·‘사이(間)’라고 쓴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둘 사이의 거리가 적당할 때 사이가 좋다고 한다.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 적당한 거리를 경이원지(敬而遠之)라고 표현했다. 공경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뜻이다. 와신상담의 주인공 구천을 보필하여 월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든 범려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했다. 너무 가깝게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하라는 말이다. 인간관계는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데이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리하면 소원해진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인간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주는 심리학 용어이다. 한겨울이 되면 고슴도치들은 온기를 찾아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픔 때문에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가시에 찔렀던 아픔을 잊어버리고 당장의 추위를 피해 온기가 있는 서로에게 다시 다가간다. 그러면 또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이렇게 추위와 아픔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즉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와의 일치’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 보면 실망할 때가 많다. 풍경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부부, 가족, 절친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이 더 많다. 특히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관여하여 간섭하고 소유까지 하려다가 기대가 무너지면 큰 내상을 입는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
세상에 모든 생물체들은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숲속의 나무들도 빛과 양분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라고, 밀림에 사는 동물들도 먹이, 번식장소 등의 생육환경과 그를 둘러싼 동료들과의 경쟁 정도에 따라 서식지의 크기를 달리한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신종 바이러스 감염병들도 야생동물과 인간 사이에 꼭 필요한 사회적 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했는지도 모른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은 사향고양이, 낙타, 박쥐 등의 중간숙주를 거쳐 인간에게까지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러스가 숙주로 삼아왔던 야생동물들의 수가 생태계 파괴로 급속히 줄어들자 인간을 새로운 숙주로 삼았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한 사회적 거리가 필요하고, 사회적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생태계는 손상을 입는다.
칼린 지브란은 결혼하는 이들에게 “그대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하더라도 거리를 두어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고 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고 노래했다. 서로가 소통하려면 담장은 낮추어야 하지만 좋은 사이를 오래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담장은 필요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건강한 거리두기가 더욱 중요하다. 자동차의 안전거리 유지가 충돌사고를 방지하듯 상대방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자세가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을 예방해준다. 자기가 없는 상대방과의 전적인 일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도 파멸로 이끈다. 새롭게 등장한 정치용어인 ‘핵관’과 ‘빠’가 이를 증명한다.
배추를 배게 심으면 국거리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김장 배추는 얻을 수 없다. 속이 꽉 찬 김장배추를 수확하려면 재식거리를 준수해야만 한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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