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산 흑돼지.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산 흑돼지.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의 여름은 검정색으로 인해 더욱 푸르다. 농작물에 따라 명도와 채도가 달라지는 푸른 밭들은 흑룡만리의 검은 돌담으로 인해 더욱 짙푸르고, 푸른 바다는 먹돌보다도 까만 제주남방큰돌고래 떼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 때문에 더욱 검푸르다. 제주음식을 더욱 제주답게 하는 것도 흑돼지, 흑우, 다금바리 등 현무암처럼 검은빛을 띤 식재료이다. 

그중 흑돼지구이는 관광객들이 제주에 오면 꼭 먹어보아야 하는 음식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그런데도 “흑돼지가 변소에서 키우던 그 똥돼지가 맞나요?”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키워왔던 재래돼지는 이익의 성호사설 ‘돼지는 보통 검은빛을 띠며 간혹 흰점이 박힌 돼지가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대부분 흑돼지였다. 재래흑돼지는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외국에서 도입된 돼지 품종과의 교잡으로 육지부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육지와 격리된 지리적 특성과 제주 고유의 돗통시 농업(화산회토의 약한 지력을 보충하고자 돗통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생태순환농업)으로 인해 1970년대까지 순수혈통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화학비료 사용이 일반화되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화장실개량사업으로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는 전통이 무너지면서 재래흑돼지는 멸종위기를 맞았다. 

이에 제주도축산진흥원은 1986년 우도 등 벽지에서 재래돼지 암컷 네 마리와 수컷 한 마리를 확보하여 순수계통번식으로 혈통을 유지하다가 2015년 3월 17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받아 약 260마리의 ‘제주흑돼지’를 보존·관리하고 있다.

제주흑돼지는 일반돼지에 없는 육질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어서 일반돼지보다 근내지방도가 높고, 불포화지방산은 많으며, 육즙침출도는 낮아 맛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제주흑돼지는 체형이 작아 무게가 덜 나가고, 성장 속도가 느려 사육기간이 길며, 새끼 수도 적어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 때문에 제주흑돼지에 버크셔 등 외국종을 교잡한 개량흑돼지가 만들어졌다. 이 개량흑돼지가 바로 우리가 먹는 흑돼지이다. 그래서 제주도가 정한 흑돼지 판별기준도 ‘품종이 제주흑돼지, 개량흑돼지(난축맛돈 포함), 햄프셔, 버크셔로 모색은 전체 흑색이어야 한다.’로 되어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흑돼지 '난돈맛돈'.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흑돼지 '난돈맛돈'.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제주에서 돼지는 가장 소중한 생활 자원이었다. 이기욱 교수는 돗통시에 대해 ‘인분을 처리하는 뒷간일 뿐만 아니라 음식물쓰레기와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하수종말처리장이요, 주곡을 재배하기 위한 돗거름을 생산하는 유기질비료공장이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노부모의 장례식과 혼기를 앞둔 자식의 혼사에 사용할 돼지고기 사육장이자, 급할 때는 팔아서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돼지저금통’이라고 말했다. 

제주에서 돼지는 마을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필자가 어릴 때 보았던 돗(돼지)추렴 과정만 봐도 그렇다. 동네 장정 여섯이 의기투합하여 돈을 모으는 것으로 돗추렴은 시작된다. 동네에서 제일 막내인 승표삼춘이 돼지의 목에 밧줄을 걸고 몰아가 동네 어귀에 있는 멀구슬나무에 매달면 돼지는 마지막 배설을 하고 축 늘어졌다. 젊은 장정 넷이 돼지 다리 한 짝씩을 잡아 공동수도 공터로 질질 끌어다 놓으면 온 동네 남자들이 모여들어 보릿짚 불로 털을 그슬리고, 삽과 칼로 털을 벗겨내었다. 

그러면 우리 마을에서 큰일이 날 때마다 도감을 맡아 하는 성부아저씨가 숫돌에 갈아서 번쩍거리는 칼로 돼지 목덜미를 따고 수애(순대)를 담을 피를 받았다. 돼지는 12배(대가리(머리), 아리굴탁(턱살), 목돌레기(목살), 전각(앞다리)x2, 후각(뒷다리)x2, 갈리(갈비)x2, 일룬(아랫배), 숭(삼겹살), 비피(꼬리뼈))로 분할되고, 추렴한 사람이 가져갈 고기(목돌레기, 전각x2, 후각x2, 숭)와 동네사람이 나누어 먹을 뼈와 내장 등 부산물로 구분해 고무다라이에 담았다. 

그동안 남정네들은 위아래 구분 없이 술잔을 돌리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날간을 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내장도 손질하고 수애도 담았다. 아낙들은 갈비와 내장 등을 삶는 등 음식을 준비했다. 어린 필자도 탄력성이 뛰어난 축구공인 오줌보를 얻기 위해 아버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다가 짓궂은 순이삼춘이 건네주는 날간에 맛 들여 입술이 피범벅이 되었다. 

돼지를 다 잡으면 남자어른들은 마루에, 여자어른들은 부엌에, 젊은이들은 마당에 끼리끼리 둘러앉아 삶은 내장과 몸국(돼지고기 삶았던 물에 모자반, 퍼대기배추, 무 등을 넣고 끊이다가 메밀을 풀어놓은 걸쭉한 국)에 밥을 먹었다. 먹음직스럽게 삶아진 접짝뼈(갈비)는 나이 드신 어른들에게 갖다 드렸다. 

목살, 앞다리 두 짝, 뒷다리 두 짝, 삼겹살은 추렴한 사람들의 몫이었지만 그 밖의 부위는 온 동네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돼지추렴은 음식을 통해 유대와 친밀감을 공고히 하는 공동체의식이었다. 

제주사람들은 고기는 삶아서 바로 돔베(도마)에서 썰어서 수육으로 먹었고, 고기와 뼈를 곤 국물은 몸국, 고사리육개장, 고기국수 등의 육수로 이용했다. 아강발(족발)은 고아서 뜯어먹거나 국으로 끓여 먹었고, 돼지새끼보는 물회(애저회)로 먹었다. 그렇지만 삼겹살을 구워 먹는 문화는 없었다. 그래서 추렴하면 숭은 모두가 가져가기를 꺼려하는 부위였다. 

삼겹살구이는 1970년대에 등장했다. 돼지고기가 수출되면서 수출이 안 되는 부위인 삼겹살이 국내시장에 유통되었고 서민들이 구워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겹살이란 용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된 것도 1994년이었다. 

그 후 삼겹살은 직장인들의 회식 메뉴로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돼지고기 부위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1838만2590마리(2021년 돼지 도축두수)에서 나오는 삼겹살도 모자라 16만6000톤(2021년 삼겹살 수입량)을 세계 16개국에 수입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54만7820마리(2021년 12월말 기준)의 돼지가 사육되어 연간 87만7412마리(2021년 기준)가 도축된다. 이는 전국 사육·도축두수의 5%에 육박한다. 도축된 돼지의 70%가 육지로 팔려나간다. 흑돼지의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증가하여 27%를 넘어가고 있다.

▲제주도축산진흥원에서 관리하는 양돈장의 모습@사진출처 제주도축산진흥원
제주도축산진흥원이 관리하는 양돈장. (사진=제주도축산진흥원 제공)

제주에서 양돈의 시발점은 1959년 아일랜드 신부 패트릭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가 새끼를 밴 요크셔 암퇘지 한 마리를 들여온 것이다. 임신부는 이 돼지가 낳은 열 마리의 돼지를 아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나누어주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돼지를 변소에 놓지 말 것’. 둘은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를 돌려줄 것‘이었다. 

그러다 농가에 축사를 지어주고 돼지를 무상으로 분양하여 미국에서 원조한 옥수수로 배합사료를 만들어 공급하는 농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양돈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제주도에 양돈이 성업하게 되었고, 이는 2006년 9월 19일 ’제주돼지고기‘가 축산물 분야에서는 횡성한우와 함께 최초로 지리적 표시(지리적표시등록 제18호)등록이 이뤄지는 토양이 되었다.

제주도는 토층이 얇고 투수성이 높아 지하수오염원에 취약한데 상수도와 농업용수의 95% 이상을 지하수에 의존한다. 그런데 양돈농가가 밀집한 서부지역 지하수인 경우 질산성질소 오염에다 장출혈성 대장균 등 병원성 세균이 매년 검출되고 있다. 

또한 양돈분뇨 악취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제주도는 2018년부터 악취관리지역을 지정해 악취허용기준을 초과하고 악취 민원이 1년 이상 집단적으로 제기된 양돈농가 100곳을 지정해 집중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1500건이던 축산악취 민원은 지난해 1886건으로 25% 이상 증가했다. 

물 좋고 맑은 공기를 자랑했던 제주가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정된 공간에서 대규모 사육을 하는 공장식 양돈(제주 양돈농가수 254호, 호당평균사육두수 2157두)으로 인해 지하수 오염과 악취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제주 돼지고기 평균 경락가격은 kg당 8343원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9% 상승했다. 이는 제주를 제외한 전국평균 경락가 4880원보다 71.0% 높은 수준이다. 흑돼지는 평균 경락가격이 1만1700원까지 치솟아 전국평균가에 비해 2배 이상 비싸게 팔렸다. 이는 올 상반기에 유행한 돼지유행성설사병(PED)으로 제주의 돼지사육두수가 지난 연말에 비해 3만6225마리(6.4%)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사육두수의 감소에 따른 제주 돼지고기 가격의 고공행진 현상은 일반돼지를 난축맛돈(난지축산연구소가 ‘제주흑돼지’를 기반으로 개발한 전체부위 구이용 품종) 등 맛있는 흑돼지 품종으로 교체해 나가면서 품질관리를 잘하면 사육두수를 획기적으로 줄여도 환경 등 외부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양돈농가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필자가 11월에 나올 제주도의 ‘제주돼지 적정 사육규모 설정 연구’ 용역결과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자의 소망은 우리 딸들도 검정으로 인해서 푸름이 더욱 빛나는 청정한 제주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되려면 양돈도 맑은 물, 푸른 들판, 파란 바다와 공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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