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관련이 없던 사건들이 하나의 추억처럼 붙어 다닐 때가 있다. 양애지(양하 장아찌)를 먹을 때마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이란 노래가 들려온다. 그녀의 짧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보랏빛 비가 그녀의 얼굴을 적신다. 생강과 샐러리를 섞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향기가 입 안에 퍼진다.
두발자유화 조치가 떨어지자마자 우리 중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커트를 한 그녀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내 머리 어때?”라 묻던 눈동자가가 떠오른다. 그 때는 단순명쾌했던 그녀의 당돌함이 싫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뒤를 재지 않았던 그녀의 당돌함이 부럽다.
어릴 때는 독특하고 강렬한 향 때문에 양애지가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향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 먹는다. 미나리무침, 갯노몰김치(갓김치), 날 콩잎쌈도 향 때문에 싫었었고 그 향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이다. 흐르는 시간은 필자의 취향도 바꾸어 필자도 부모님처럼 단맛보다는 쌉쌀한 맛을 즐기는 어른이 되었다.
양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다. Zingiber mioga가 학명으로 생강과 생강속에 속한다. 양하는 다육질의 지하경으로 번식한다. 봄에 지하경에서 올라온 긴 타원형의 잎들이 서로 어긋나고 겹치면서 줄기처럼 자란다. 가을이 되면 지하경의 마디에서 꽃대가 땅으로 나와 보라색 꽃봉오리가 달린다. 꽃봉오리들은 턱잎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길이는 3~7cm로 총알모양을 하고 있다. 겨울이 되면 잎은 시들어 사라지고 뿌리로 겨울을 난다.
이 총알모양의 꽃봉오리가 주요한 식용부위다. 제주사람들은 꽃봉오리를 데쳐서 무쳐 먹거나 장아찌로 담가 먹는다. 봄에는 연한 순을 먹기도 한다. 돌돌말린 잎의 새순으로 된장무침을 하거나 국을 끓여 먹는다. 추석 무렵에 먹는 양하무침은 초봄에 먹는 동지김치와 더불어 제주 특유의 꽃 음식이다. 전라도 김제지방에서도 상어고기를 넣고 양하산적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린다.
양하는 아직 제주도와 전라도 일부지방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식재료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묘가라고 해서 송이와 함께 가을을 대표하는 고급식재료이다. 절임, 튀김, 나베 등 다양한 요리에 쓰인다. 요즘에는 양하가 ‘한국인의 밥상’을 통해 알려지면서 요리전문가들이 독특한 색과 향을 이용하여 샐러드를 만들기도 하고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년층에서는 효소를 담기도 한다.
양하를 딸 때는 색깔이 보랏빛으로 선명하고 윤기가 나며 단단한 것이 좋다. 봉오리가 너무 크거나 꽃이 핀 것은 질기므로 무침은 피하고 장아찌를 담근다.
양하는 야성이 강하고 지하경으로 번식하는 여러해살이 풀이여서 한 번 심으면 손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양하를 딸 때 벌떼처럼 달려드는 모기를 빼면 필자처럼 게으른 농부에게 딱 맞는 채소이다. 양하를 키우려면 초봄에 지하경을 15cm 길이로 잘라 5cm 깊이로 묻어주면 된다. 울타리 서북쪽이나 방풍수 아래의 그늘진 곳이 좋다. 햇빛이 잘 드는 곳과 물 빠짐이 나쁜 곳은 피해야 한다,
〈중약대사전〉에 따르면 양하의 뿌리줄기는 맵고 성질은 따뜻하여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하고, 월경을 조절하며, 기침과 가래를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부기를 가라앉힌다고 기록되어 있다. 꽃봉오리나 잎을 이용하는 채소보다는 뿌리줄기를 이용하는 약용작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양하는 칼륨, 칼슘, 마그네슘, 철분 등 무기질이 다양하게 함유되어 있다. 양하 특유의 향을 내는 성분인 알파피넨(α-pinene)은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항균작용을 하여 체내 면역력을 높여준다. 꽃봉오리에는 항산화성분인 안토시안도 들어있어 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최근에는 양하에 혈액과 간의 중성지방을 감소시키고 대사증후군의 주요 원인인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하는 효능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양하를 당뇨증, 고지혈증, 고혈압, 비만 치료에 적용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따라서 양하는 기능성 식품으로 잘 개발하기만 하면 제주를 대표하는 약선 나물로 등극할 가능성이 높다.
처마 밑이나 우영팟담 아래에 집집마다 심었던 양하가 사라지면서 추석 상에 올렸던 양애탕쉬(양하무침)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양애무침에 메밀가루를 입혀서 익힌 양애지메멀(양아지메밀)은 이미 사라졌다. 양하무침도 커트머리를 한 그 애처럼 추억으로만 남을 까봐 걱정이다.
어머님 댁에서 얻어온 검보라빛 양애지를 찢어 밥 위에 올려놓는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커트머리에서 보랏빛 비가 흘러내린다. 강렬하고 독특한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아삭아삭한 양애지가 참 잘 익었다. 필자도 독특한 향을 내는 잘 익은 어른이고 싶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격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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