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자료사진. (사진=고만자)
단풍 자료사진. (사진=고만자)

여름 내내 맹위를 떨쳤던 초록의 잎들이 낙엽으로 떨어져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검붉게 익은 열매들은 새들의 입과 똥구멍을 거쳐 씨앗으로 뿌려지고 있다. 나무는 이렇게 스스로 떨구고 스스로 먹힘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단풍잎도 생명을 잇기 위한 몸부림의 산물이다. 갈잎나무들은 추운 겨울에 대사활동을 왕성하게 하면 잎과 줄기가 지닌 수분 때문에 얼어 죽게 된다. 그래서 갈잎나무들은 최저기온이 5℃ 이하로 내려가면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한다. 

갈잎나무는 먼저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 떨켜층을 만들어 수분과 양분의 이동통로를 막는다. 그러면 광합성작용으로 만들어진 포도당이 줄기로 이동하지 못해서 잎에 쌓이게 된다. 그러면 아브시스산(ABA)이 증가해 엽록소가 파괴되고 엽록소에 가려졌던 색소들이 드러난다. 그렇게 해서 안토시아닌이 많은 단풍나무와 담쟁이 등은 붉은색 계통으로, 크산토필이 많은 은행나무와 생강나무 등은 노란색으로, 카로틴이 많은 감나무 등은 주황색으로, 타닌이 많은 상수리나무 등은 갈색을 띠는 것이다. 

단풍나무 자료사진. (사진=고만자)
단풍나무 자료사진. (사진=고만자)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단풍잎은 아브시스산이 떨켜층의 세포벽을 녹이는 효소를 분비하면 스치는 바람에도 떨어진다. 갈잎나무는 이때부터 뿌리에서의 수분흡수를 멈추고 대사활동을 최소화한다. 불필요한 것은 다 떨구어낸다. 지난 여름 몸을 불렸던 잔가지는 매서운 북풍에 속절없이 꺾이고, 병충해에 부실해진 굵은 줄기는 폭설에 뚝뚝 부러지는 것이다. 이제 갈잎나무는 고갱이만 남았다.

고갱이만 남은 갈잎나무는 겨울눈 보호 작전에 돌입한다. 겨울눈은 봄이 되면 새잎과 새꽃으로 피어나는 싹의 요람이다. 하지만 이름처럼 겨울에 생긴 눈이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헌것에서 부드럽고 연약한 새 생명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겨울눈은 생육이 왕성한 여름에 이미 푸른 가지에 잉태되었다. 잎들이 다 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눈에 띄는 것이다. 

겨울눈은 꽃이 될 꽃눈과 잎이 될 잎눈으로 나뉜다. 꽃눈은 꽃이 될 조직을 싸고 있기 때문에 꽃처럼 둥글고 넓적하다. 잎눈은 잎이 될 조직을 옆으로 말고 있기 때문에 길고 뾰족하다. 겨울눈은 생기는 위치에 따라 끝눈(정아)과 곁눈(측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끝눈은 가지 끝에 달리고 곁눈은 가지 옆이나 끝눈 양쪽 옆에 달린다. 곁눈은 끝눈이 잘못될 때를 대비하여 보험에 들어놓은 예비군이다. 

단풍 낙엽 자료사진. (사진=박지희)
단풍 낙엽 자료사진. (사진=박지희)

이제 갈잎나무에게는 내년 봄까지 생명을 이어주는 겨울눈을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다. 겨울눈은 얼거나 마르지 않기 위해 솜털, 비늘잎, 진액으로 눈의 내부를 감싸서 무장한다. 벚나무, 개나리 등의 겨울눈은 여러 겹의 비늘로 된 옷을 입고, 목련, 갯버들 등의 겨울눈은 부드러운 털 코트를 입는다. 끈끈한 즙이나 번질거리는 기름 성분의 옷을 선택한 나무들도 있다. 칠엽수가 이에 해당된다.

갈잎나무는 때가 되면 스스로 헐벗고 딱딱해져서 가장 보드랍고 연한 새 조직을 감싸서 보호하다가 또 때가 되면 새것을 터트린다. 딱딱한 헌것과 부드러운 새것의 완벽한 교체이다. 

새것이 묵은 것을 스스로 대체하는 것을 신진대사라고 한다. 생물은 신진대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강물도 뒤의 얕은 물이 앞의 깊은 물을 밀어내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우리나라 정치의 신진대사는 끊긴 지 오래다. ‘엘리트-자산가-장·노년층-남성’인 세력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는 불평등, 양극화, 세대·젠더 갈등 문제를 전혀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또 정치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풍길 산책. (사진=고만자)
단풍길 산책. (사진=고만자)

민주주의는 주변 세력이 기득권 세력을 끊임없이 대체하여 지배하는 세력과 지배받는 세력이 일치할 때 최고에 이를 수 있다. 

나도 내가 만든 세계에 갇혀 딱딱해지고 있다. 너무 딱딱해져서 새것을 품는 유연함을 잃었는지 경계할 나이가 된 것이다. 헌것이 묵은 자리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아등바등한다고 한다. 이제 아등바등하는 것에서 내려와야 할 때가 되었다.

내려놓을 때를 고민하는 나에게 나무의 삶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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