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가 미소 띤 얼굴로 양파가 들어있는 대야를 가리켰다. 양파를 까라는 무언의 지시다. 머뭇거렸다가는 평화가 깨질 것이 뻔하다. 얼른 칼을 집어 꼭지와 뿌리를 잘랐다. 상처를 입은 양파가 ‘프로페닐스르펜산’이라는 최루가스를 발사하여 눈물샘을 자극했다.
프로페닐스르펜산은 수용성이다. 따라서 물에 적신 칼로 양파를 썰면 눈이 덜 따갑다. 그럼에도 굳이 손으로 줄기 비닐을 한 꺼풀씩 벗겨내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눈물을 질질 짜며 마음껏 울어본단 말인가? 속으로는 부평초처럼 흔들리면서도 겉으로는 큰 바위 얼굴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양파를 까는 시간은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터진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속이 다 개운하였다.
4등분한 양파를 밀폐용기에 담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벗겨도 벗겨도 같은 모양이 계속 나오는 양파의 일관성이 영원불멸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파라오가 사망하면 양파를 넣어 매장하였고, 피라미드 내부 벽도 양파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 덕분에 파라오는 밀폐된 피라미드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각시가 양파 조각을 된장에 찍어 내 입에 찔러 넣었다.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노동자들에게 지친 몸을 회복하라고 양파를 지급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양파가 혈액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해서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이 많이 먹었다.
‘중국인의 역설’은 중국인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데도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낮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양파요리를 많이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에 양파에 들어있는 퀘르세틴과 황화합물 성분 등이 혈당을 내리고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며 지방의 흡수를 저해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갑자기 피로에 찌들어 활동량이 크게 줄고 뱃살이 나오는 요즘의 내 처지가 떠올랐다. 각시가 양파를 빌어 경고 메시지를 날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생양파를 먹은 속은 쓰리고 아렸다.
각시가 식초와 설탕을 넣고 끊인 간장을 밀폐용기에 부었다. 이제 양파는 매운맛이 사라지면서 달콤한 맛을 낼 것이다. 양파의 독특한 향과 매운맛을 내는 성분은 황화아릴이다. 이 성분은 열을 가하면 대부분은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일부는 설탕 50배의 단맛을 내는 ‘프로필메르캅탄’으로 바뀐다. 열을 가하면 양파는 반대를 이겨낸 맹렬한 첫사랑처럼 달콤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매콤달콤한 양파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양파가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속이 쓰려야만 했다.
양파가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08년 서울 뚝섬 원예모범장에서 양파 시험 재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산업적 재배가 이루어진 것은 1960년대였다. 양파는 짜장면이 외식의 대명사가 되면서 고추, 마늘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양념 채소로 자리를 잡았다.
양파는 비교적 저장이 잘 되어서 계절적 수요를 타지 않고 일 년 내내 꾸준히 소비된다. 1인당 연간 양파소비량도 28.6kg으로 거의 변동이 없다. 외국산 비율도 6%를 넘지 않는다. 정부가 물가를 잡으려고 저율할당관세물량(TRQ)로 농수산물유통공사를 통해 수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내산으로 충당이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파가격은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을 친다.
2013년에 ㎏당 1300원대까지 올랐던 양파가격은 2014년에는 500원대로 폭락했다가 2015년에는 다시 1600원대까지 치솟았다. 또 2019년에는 600원대로 급락하더니 2021년 초에는 1700원대까지 급등했다. 그러다가 금년 2월에는 400원대까지 하락했다가 7월 들어서 1400원대로 진입하여 고공행진 중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에서는 산지폐기, 비축수매 등의 시장격리조치와 TRQ(저율할당관세물량) 수입 확대, 비축물량 방출 등의 공급확대정책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고 있다. 그러면서 계약재배확대, 가공산업육성, 빅데이터에 기반한 농산물가격예측시스템구축 등을 부르짖고 있다.
이런 사후의 공급조절책으로는 농산물 가격파동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예측 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농산물 가격은 안정되고, 농업의 지속가능성도 커진다. 가격보장제, 공공수급제 등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기후위기로 농업생산 환경의 불안전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전쟁은 세계 식량수급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19.3%에 불과하다. 시장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전환 없이는 농업의 지속성과 식량자급은 불가능하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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