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면 해방의 길을 나섰다
지난 2017년 제주에서 뜻깊은 문화예술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바람난장’이란 이름으로 제주 곳곳을 다니며 문화예술의 색을 입히는 실험 예술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문학가, 연극인, 사진가, 미술가, 음악가, 무용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다. 그들은 섬 속의 섬인 비양도, 우도, 가파도 등을 비롯해 제주 역사의 현장, 오름, 포구, 곶자왈, 숲, 박물관 등을 누볐다. 비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거나 눈발이 날리는 날은 오히려 더 프로젝트가 힘을 얻었다.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자연이 그들의 난장에 멋을 더했다. ‘바람난장’은 제주의 생태환경과 문화, 인문 자원이 오래도록 빛나길 바라는 몸짓이며 굿이고 축제다.
무용가는 몸짓으로 자연을, 시대를, 사람을 대변했다. 문학가는 글을 지었고, 사진가는 찰나를 기록했다. 시인인 김정희 책방지기는 시를 낭송하고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때론 그날 그 장소에서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기행을 엮어 2020년 『순간, 다음으로』라는 사진시집을 발표했다. 동시만 쓰는 시인이 아니다.
난 거기 없어라
숨을 겨를도 없어라
검정고무신 하나씩
떨어뜨려
나 간다
다시 못 올 이곳에
울어줄 이 남아 있으려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총칼에 떠밀려 가네
너는 어디 있고
나는 어디 누웠나
바람에 섯알오름 풀 냄새
이곳으로 날아와
안부를 전해주네
잊지 않았구나
보이네
흰나비들로 나왔네
- 김정희 시 <섯알오름 칠월 칠석> 전문
제주. 이 땅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땅의 기원은 어디인지, 제주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흘렀는지 그 면면이 켜켜이 쌓인 사진시집이다. 김정희 책방지기는 바람난장에 나서는 매주 토요일은 쉴 틈 없는 일상의 가장 큰 놀이이자 쉼이라고 강조했다. 고향 땅을 누비는 일, 고향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해 보는 일. 그러니까 고향땅을 놀이터 삼아 나비처럼 날아 소식을 듣고,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의 천성이라는 말. 바람난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니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시집을 기대해 본다.
일상을 살았고 시가 됐다
바람난장이 사진시집으로 세상에 나왔듯, 그가 펴낸 책들은 그의 어린시절의 일화와 삶의 나날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정희씨는 우도초등학교에서도 제주어와 동시 교육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일주일에 단 하루 있는 이 수업을 자의로 불참해 본 적이 없다. 폭우가 쏟아져도 빗길을 뚜벅뚜벅 걸어 학교에 갔다. 배만 운항한다면 ‘일주일에 한 번은 우리가 만난다’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해녀의 고장 우도에서 섬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온 작품이 그림책 <애기해녀학교>다. 제주해녀문화와 함께 제주어를 알리고 싶었던 마음도 한데 담았다.
제주어 동시 그림책인 <청청 거러지라 둠비둠비 거러지라>는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으로 그만의 추억이 아닌 그 시절을 보낸 제주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 그 시절의 한 단면이 안타깝게도 잊히는 언어가 돼 버린 제주어로 기록돼 있다.
이렇게 그의 작품으로 나오는 일상의 핵심은 자신이 아이였던 유년시절과 지금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일선에서 동시와 제주어를 지도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는 서귀포 일대 학교를 중심으로 수업을 많이 했다. 제주시에 집에 있어서 서귀포로 가려면 매일 오전 7시 30분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정직한 것인지 서귀포에서 오전 11시 강의가 있는 날도 어김없이 7시 30분에 출발하곤 한단다. ‘서귀포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면 몸이 알아서 일어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삶의 원동력이란다. 아이들은 감정에 솔직하고, 귀여운 비밀이 있고, 질투는 하지만 시기가 없고, 무엇보다 계산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산하지 않는 삶의 자유로움을 알기에 그 자유를 계속 누리고 싶어 더욱 아이들 곁에 머무르게 된다고 했다. 아이들의 시선을 가진 그가 보여주는 동시와 그림은 그래서 따듯하다.
고향집에서 엮어가는 인연
책방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은 아동문학가의 길을 걷는 중에 생겨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사 때마다 짐이 되곤 해서 그 책들을 보관할 겸, 작업실로 쓸 겸 고향집을 찾았다. 그때 마침 전국적으로 책방 붐이 일었다. 내친김에 자신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이 공간을 아이들을 위해 개방해보자고 생각이 미쳤다. 그게 책방의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이 공간엔 그의 탄생에서부터 청소년기의 추억이 가득하다. 흑백사진 2장이 벽면에 걸려 있는데 어린시절의 책방지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할머니부터 3대에 걸쳐 살고 있다. 100년이 된 집에 3대의 삶과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젠 이곳을 거치는 수많은 이들이 '추억'이라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 이 집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근원이랄 수 있겠다.
그의 숱한 이야기들도 이곳이 중심이다. 커서 보니 참 좁은 공간에 부모님과 여섯 형제가 살았구나 싶다. 그런데 어릴 때는 집이 좁았단 생각은 없었다. 늘 웃을 일이 있었다. 사계절 내내 싱싱한 채소가 재배됐던 할머니의 텃밭은 오랫동안 정희씨의 놀이터였고, 나이 차 나는 언니는 알뜰살뜰 정희씨를 챙겨줬다. 오빠들과 티격태격했던 일들도 역시 재밌는 기억이다.
마을은 또 어떤가, 여름이면 시원한 쉼터가 돼주었던 폭낭과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비석거리, 비석거리에서 알동네로 이어주는 물동산과 알동네의 담뱃가게, 물동산 삼거리의 방앗간과 선착장. 그 모든 곳이 어린 정희씨에겐 모험의 장소였다. 이 추억들은 그녀가 쓴 책들에 하나, 둘 녹아있다.
동시를 쓰는 작가이니 동시집으로 책장을 채웠다. 함덕해수욕장이 있는 곳을 제외하면 조용한 시골이다 보니, 아이들을 위한 문화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았다. 그래서 책방 문을 연 이듬해, 한 달에 한 번씩 문학 작가를 초청해 북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순수 자비를 들여서 마련한 행사였다. 이 행사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였고, 무엇보다 어른들의 호응이 좋았다. 마침, 기쁜 소식이 들렸다. 이런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사업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이 커졌다. 작가 초청에 쏟아부었던 자비를 자신의 책을 나눠주는 이벤트에 쏟게 된 것. 이 행사는 해마다 이어지고 있고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자신만의 책을 갖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북토크 콘서트에 참여한 작가들과는 끈끈한 우정이 형성돼 매해 만나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라고 한다.
김정희 책방지기는 이곳이 사랑방이 되길 꿈꾼다. 저녁이면 어른들을 위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낮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밤에는 일상에 지친 어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고. 앞으로도 그는 제주어와 제주문화를 아이의 시선에서 알리는 책 작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또, 아이들 곁에서 교육도 꾸준히 하면서 제주의 바람을 타고 섬 곳곳에서 난장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책방에 돌아와 ‘오줌폭탄’이 궁금한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겠지.
이 책방의 특별함은 책방지기가 <오줌폭탄> 책과 책방의 탄생 일화를 재밌게 들려준다는 점이다. 태풍 힌남노가 곳곳에 생채기를 냈지만 더위를 가져갔다. 하룻새 바람의 온도와 습도가 바뀌어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시가 어울리는 계절, 오줌폭탄에서 책방지기가 들려주는 책방의 탄생을 직접 들으며 동시의 세계로 여행을 나서는 것도 좋겠다.
김정희 책방지기는 곧 새로운 동시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새로 선보일 동시집을 포함해 그가 펴낸 책들을 추천한다. 그림책 <애기해녀학교>, 동시집 <오줌폭탄>, 시낭송 시집 <물고기 비늘을 세다>, 제주어 동시집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제주어 동시 그림책 <청청 거러지라 둠비둠비 거러지라>, 사진시집 <순간, 다음으로> 등이 있다. 그의 책들은 책방 오줌폭탄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 동시 전문 책방 오줌폭탄은 제주시 조천읍 함덕5길 8-23에 있어요.
월요일은 쉬고요, 매주 화~일 낮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어요.
좁은 골목길이 여전히 많은 곳에 있어서
동네를 둘러보는 기쁨도 커요.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함덕 바다와 서우봉이 맞아 준답니다.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책방의_탄생] 어른이 되면 신나게 살거야!
- [책방의_탄생] 도서출판 텍스트에서 한 뼘의 책방까지
- [책방의_탄생] 여름날의 봄햇살
- [책방의_탄생]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 [책방의_탄생] 섬에서의 시간 : 여행 중입니다
- [책방의_탄생] 휴식과 이완의 호흡
- [책방의_탄생] 지금만이 진실된 순간
- [책방의_탄생] 떠나면 알게 된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 [책방의_탄생] 제주를 위한 인터뷰
- [책방의_탄생]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 [책방의_탄생]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 [책방의_탄생] 오래됐지만 살아 있어 아름다운 책들의 방
- [책방의_탄생] 귤밭을 지키고 싶었어요
- [책방의_탄생] 나누고 소통하고 인연을 만드는
- [책방의_탄생] 아버지의 월급 선물
- [책방의_탄생] 창조적 부적응자
- [책방의_탄생]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