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 (사진=요행)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 (사진=요행)

머리가 작동을 멈췄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글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어느새 손과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감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건 아니지 이렇게 쫓기듯 내달린다고 글이 나올 리 없다. 멈춰야 했다. 지난주는 숨 고르기를 하느라 연재를 한 주 쉬었다. 쉬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일상에서 조금 비켜나서 나 자신과 요즘의 생활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작은 숨구멍이 하나 필요했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책방작은숲’이다. 도심 속 상가와 주택이 밀집한 곳에 다소 이질적인 간판 하나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간판에 적힌 글자는 단 하나. ‘책’. 

골목의 풍경에 사뭇 동떨어진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려서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여행지에 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얀 외벽에 정갈한 간판. 카페처럼 도로를 향해 나 있는 창문 사이로 작은 커피머신과 책들이 보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얀 벽에 걸린 적갈색의 서재가 눈에 들어온다. 스누피 인형과 앙증맞은 소품들, 그리고 와인까지. 앉을 수 있는 곳은 계산대를 겸한 작은 바와 가벽 칸막이 안쪽에 자리한 일인용 책상 그리고, 출입문 옆의 작은 탁자와 의자가 전부다. 유럽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 있을 것 같은 깔끔하고 조용한, 낯설지만 왠지 포근한 그런 책방이었다.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 출입문을 열면 보이는 풍경. (사진=요행)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 출입문을 열면 보이는 풍경. (사진=요행)

공간은 주인의 성향과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30대의 책방지기는 밝고 맑은 웃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다. 대전이 고향인 그는 약 4년 전 제주로 이주했다. 그 전엔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로 일한 경력이 있다. 게스트하우스 대표는 식당을 운영하게 되면서 책방지기에게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그렇게 다시 제주로 왔다. 그렇게 약 4년을 이번엔 식당 스태프로 일하다가 올해 4월 책방을 꾸렸다.

책방을 운영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던 막연한 꿈이었다. 제주에 계속 머무르려면 좀 더 분명한 자신만의 일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꿈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정으로 책방 운영에 뛰어들었다. 책방 문을 열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엔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마치 운명이었던 듯이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고, 실내 장식을 크게 손보지 않아도 됐다. 

책방에는 주로 여행에 관련된 책이 많다. 서가의 2/3는 독립출판물이다. 독립출판사와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에 독립출판물을 많이 진열하게 됐다고 한다. 책방지기가 엄선한 책들로 가벼운 수필 같지만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여행길에서 혹은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책방지기는 수필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여행 서적을 좋아한다고 했다. 제주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는 여행이 일상인 여행가였다. 여행은 그에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서 유아교사로 근무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들과 함께 뛰노는 것이 즐거웠지만 교사의 임무는 돌봄 못지않게 서류 작업이 많았다.

야근이 일상인 생활이 이어지면서 번아웃이 크게 왔다. 삶도 일도 그 어디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일상의 멈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기였다. 숨을 고르기 위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날것들에 몸을 내맡기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국내 이곳저곳을 다녔다. 첫 여행지는 여수와 순천이었다. 그때 본 풍경과 그곳에서 느꼈던 감흥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생생하다. 혼자여서 외롭다는 느낌보다 혼자여서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것들이 신선했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었던 지점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한 번 극복한 후 맛본 성취감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또렷하게 했다.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의 김혜경 책방지기. (사진=요행)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의 김혜경 책방지기. (사진=요행)

여행을 하기 전까지 그는 알 속에 있던 새였다. 딱딱한 껍질이 그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막아줬지만 정작 그는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왔다. 낯선 풍경, 낯선 문화, 낯선 언어는 불편했고, 두려웠다. 그러나 피부색, 종교, 성별, 나이 등이 차별이 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는 쓸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내 안위를 궁금해하고 걱정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었음을 알게 됐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그는 이전보다 훨씬 내면이 단단해졌다. 경험은 생이 주는 값진 선물이었다. 이러한 생의 선물은 무척 황홀해서 자꾸만 여행길에 그를 올렸다. 유아교사로 2년을 꾹 견디고 일하다 그만두고 훌쩍 여행에 나섰다. 또다시 돌아와 또 2년을 묵묵히 일하고 또 떠나길 반복했다. 

아시아와 유럽, 미국을 두루 다녔는데 무엇보다 제주에서의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했다. 어느 날 여행을 떠나 귀국할 때 돌아갈 곳이 대전이 아니라 제주라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착지를 바꿨다. 제주에선 이상하게 여행에 나서고 싶은 욕구가 크게 들지 않았다. 제주가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 정도면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있는 오름과 어디에서든 만나는 검은 현무암 돌담, 매일 같이 뜨고 지는 해지만 그 해가 빚어내는 빛의 마술,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 투박한 듯 독특한 제주어와 부지런한 할망들, 사계절 늘 푸른 상록수 등. 제주의 매력은 끝이 없었다.

책방지기는 제주에서도 특히 종달리를 좋아한다. 버스로 이동하는 접근성이 좋기도 하고, 특히 지미봉에 올랐을 때 보이는 풍경은 비길 데가 없다. 섬에서 또 다른 섬을 바라보며 그 사이에 놓인 바다와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하늘. 그 풍경에 책방지기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말들을 바람결에 실려 보냈을까. 가벼워진 마음엔 새로운 꿈과 희망들을 들여놓을 수 있었으리라. 종종 잊지만 비워야 채울 수 있으므로.

'책방작은숲'에는 손님들을 위한 와인이 준비돼 있다. (사진=요행)
'책방작은숲'에는 손님들을 위한 와인이 준비돼 있다. (사진=요행)

책방 이름이 ‘작은 숲’이지만 정작 책방 내부에서 숲의 이미지를 찾기는 다소 어렵다. 식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숲에 관련된 책이 주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묘한 점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숲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큰 숲이 아니라 정말 작은 숲이다. 정원 같은 느낌의 한 사람이 걷기에 딱 좋은 정도의 작은 숲. 

이 공간은 혜경씨에게도 해방의 공간이다. 스트레스를 쌓지 않고 욕심을 내려놓는 실험을 하고 있다. 책방 운영 이제 7개월 차, 얼마 전 그는 생각보다 책방의 수익이 크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러기 위해 시작한 책방이 아닌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됐다. 책방은 책방대로 두고 다른 재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아서 다시 행복해졌다고. 물질적인 것이든 관계에서 오는 것이든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은 걸 선택하는 것. 누군가의 눈에는 손해를 입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라면 혜경씨에겐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혜경씨는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휴식처를 제공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책과 함께 준비해 놓은 것이 있다. 와인이다. 혜경씨가 여행을 할 때 한적한 한낮의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책 읽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걸 책방손님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가볍게 한 잔 하면서 책방에 머물러도 좋고 공간을 빌려서 와인과 책을 즐겨도 된다.

책방지기는 손님을 의식하지 않는다. 무심한 것이 아니라 손님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듯한 기분은 앞서 언급한 가벽 칸막이 안쪽에 자리한 일인용 책상에서 극대화된다. 

제주시 삼도일동에 위치한 '책방작은숲'의 비밀공간. (사진=요행)
'책방작은숲'의 비밀공간인 1인용 책상. (사진=요행)

벽에 붙은 책상은 별다른 칸막이가 없는데도 1인용 독서실 책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오른쪽은 진짜 벽이고, 왼쪽엔 서가가 벽이 되어주는 형식이다. 오직 등 뒤만 개방된 형식인데 등 뒤는 계산대와 연결이 돼서 방해를 받을 일이 없다. 독립성을 확보한 이 공간에서 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한 손님은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누구에게나 마음이 지치는 날이 있다. 가족과 친구, 지인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털어놓기 싫은 이야기들이 있는 그런 날. 그럴 때는 동화 속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쳤던 대나무숲 같은 곳이 있었으면 한다. 이곳이 손님들에게 그런 숲이 돼준 것이리라. 책방지기도 참 놀랍다고 했다. 책방을 하면서 이 공간에서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책방을 책방답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이들이라는 걸. 그들의 영향으로 혜경씨는 이곳의 의의를 다잡곤 한다. 헛헛한 누군가의 마음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 언제든 가면 신선한 공기와 초록의 안식을 주는 숲처럼 말이다. 

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혜경씨는 그동안 그 많은 여행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게 여행이라지 않나. 여행길에서 자신이 경험한 생의 기쁨을 기꺼이 타인과 나누기 위해 혜경씬 제주로 돌아와 닻을 내렸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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