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소재 동네책방 '그리고 서점'. (사진=요행)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소재 동네책방 '그리고 서점'. (사진=요행)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겨울이 왔음을 실감한다. 나는 추운 이 계절을 좋아한다. 코끝이 시릴수록 사람의 온정이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겨울에 즐겨 먹는 국민 간식거리들이 있다. 굽거나 삶은 고구마, 호두과자, 붕어빵 그리고 뜨끈한 국물이 함께 제공되는 어묵까지! 그 언젠가 겨울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붕어빵과 어묵을 팔던 아주머니가 '몸 좀 녹이라'며 어묵국물을 건네주셨던 걸 기억한다. 또 어떤 날은 호두과자나 땅콩과자 등을 살 때 덤이라며 더 넣어주시던 분들도. 겨울의 온정을 느낀 나의 경험담이 먹는 것들 뿐이라 다소 민망하지만 무릇 겨울엔 그 유명한 ‘사랑의 온도탑’을 상징으로 곳곳에서 더욱 분주한 나눔이 이어진다. 

여기,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들에게 언제나 ‘커피 드시겠어요?’라며 무료 음료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 곰돌이 푸와 같이 푸근하면서도 친숙하고 따듯한 인상을 풍기는 정현덕 책방지기가 운영하는 ‘그리고 서점’이다. 수산봉과 수산저수지, 곰솔과 그네, 초당옥수수와 100여 개의 시비 그리고 작아서 더욱 정겨운 물메초등학교의 마을에 그리고 서점은 지난해 7월, 자리를 잡았다. 물메는 마을의 옛지명이다. 

책방 이름엔 ‘그리다(Paint), 그리고(and), 그립다(miss)’란 의미가 두루 담겨 있다. ‘꿈을 설계하고 미래를 계획해 삶을 지속하며 때때로 잊히거나 사라진 것을 그리워한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리고’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서점'의 정현덕 책방지기. (사진=정현덕)
'그리고 서점'의 정현덕 책방지기. (사진=정현덕)

정현덕 책방지기는 대기업의 라면 개발 부서에서 약 15년간 근무했다. 야근이 잦았고 무언가를 해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를 더해갔다. 타고난 성품이 근면성실함으로 대단한 성과들을 냈다. 하지만 숨은 쉬고 있으되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날들이 길게 이어졌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듯했다. 오죽하면 아내가 일을 그만두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약 10년 전 제주로 발령을 받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았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하고 약 6년 전 제주로 귀촌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남편의 심신의 건강을 걱정했던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뜻에 따라줬다. 귀촌에 뜻을 두었지만 제주의 땅값은 너무 비쌌다. 아내가 먼저 책방 운영을 제안했다. 아내도 그렇지만 정현덕 책방지기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 

아내와 약속한 것은 딱 3개월의 책방 운영이었다. 2018년 11월,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 ‘그리고 서점’의 문을 열었다. 애월교육협동조합 ‘이음’의 공간을 빌려서 한 켠에서 200권의 책을 가지고 책방을 꾸렸다. 3개월이란 운영 기간과 외진 시골 마을이라는 점에서 너무 많은 책은 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방은 의외로 선전했다.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구경하고, 어르신들이 오며 가며 살피며 차츰 안부를 묻는 주민들이 느는 것이 좋았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책방 하나가 생긴 것뿐인데 묘한 활기가 돌았다. 

아내와 약속한 기한이 다가왔지만 책방 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이미 현덕씨의 개인은 물론 현덕씨 가족과 동네 주민분들의 삶이 3개월 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시대 상황도 책방의 문을 걸어 잠그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시기임에도 사람들이 책방을 찾아줘서 현덕씨는 더 고집을 부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세가 무섭게 치솟아 오를 때 인근 초등학교가 일제히 문을 닫으면서 책방도 잠시 쉼표를 찍었다. 시리니케이크라는 동네 한 베이커리에서 잠시 책방을 운영하다가 정현덕 책방지기가 했던 프로그램에서 만나 인연을 맺게 된 분을 통해 물메마을을 알게 됐다. ‘시가 흐르는 물메 마을’인데 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에게 이만큼 적절한 터가 또 있을까?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소재 동네책방 '그리고 서점' 내부. (사진=정현덕)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소재 동네책방 '그리고 서점' 내부. (사진=정현덕)

책방지기는 현덕씨가 늘 가슴에 품어 왔던 미래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 아버지의 월급 선물 덕분이다. 그때는 종이봉투에 한 달 급료가 담겨 나왔다. 받는 이의 이름과 금액, 근무 기간 등. 사람의 손으로 꾹꾹 눌러 적은 월급봉투는 촉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 오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지난 한 달에 대한 보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지폐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직접 상가에 가서 무언가를 구매한다. 

월급날이면 어떤 집에서는 통닭 냄새가 가득했고, 빵 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담장 타 넘었다.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받은 아이들이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과자를 나누던 일, 옷을 곱게 차려입고 외식을 즐기던 가족들의 모습 등. 지금은 월급이라는 것이 통장을 스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980~1990년대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부모님이 일을 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마운 일인지 한 달에 한 번 체감하곤 했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나 부를 뽐내기 위한 노동처럼 어느 한 켠에 치우친 것이 아닌 소시민들이 작은 행복들을 켜켜이 쌓아나가던 때의 일이다. 

현덕씨네 가족도 그런 소시민이었다.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온 가족이 경상남도 마산 창동 시내로 향했다. 당시도 창동 명소였던 코아양과 앞에서 온 가족이 아버지를 기다렸다. 월급봉투를 가슴에 품고 온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인근 경양식 돈가스 가게에서 저녁을 먹였다. 현덕씨와 동생은 돈가스를 먹을지, 함박스테이크를 먹을지 매번 행복한 고민을 했다고. 따듯한 수프로 빈속을 달래고, 푸짐한 돈가스로 배를 채우면 가족은 인근 서점인 ‘문화서림’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점' 정현덕 책방지기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사진=정현덕)
'그리고 서점' 정현덕 책방지기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사진=정현덕)

문화서림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세계 곳곳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 돈가스를 먹을지 함박스테이크를 먹을지를 고민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되게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그 어떤 책도 마다하지 않고 아들들이 원하는 책을 꼭 한 권씩 사줬다. 만화책이거나 잡지여도 상관이 없었다. 현덕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이 월례 행사가 이어졌다고 하니 1년이면 12권, 7년간 현덕씨 형제에게 각각 84권의 책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이 특별한 월례 행사로 현덕씨는 어느 순간부터 가슴 속에 책방지기라는 꿈을 품게 됐다. 세상에 좋은 책을 많이 알리고 싶었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자신의 방식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책방은 아버지와 함께 그렸던 미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곳이며, 그래서 그의 남은 삶을 그려나갈 곳이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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