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사진=요행)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사진=요행)

보경씨는 제주 이주로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에 터를 잡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족들과의 의논 하에 제주행이 결정됐고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던 차에 보게 된 곳이 이 마을이었다.

제주가 고향인 사람이라면 젊은 나이에 중산간 마을로 들어가 사는 것이 흔하지 않다. 생활반경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트를 가거나 병원에 가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생활시설이 발달한 제주시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보경씨 가족에겐 그런 점은 크게 고민거리가 아니었나 보다. 하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편이었다면 굳이 서울을 떠날 이유도 없었을 것이리라. 보경씨 가족이 바랐던 것은 사계절 내내 초록의 숨을 뿜어내는 제주의 자연이었던 듯 하다. 

앞서 말했듯이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은 좁은 도로에 하천을 끼고 있다. 평소에는 물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나무가 울창해서 바람결에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이 끊이지 않는다. 

바람. 제주에서 바람을 빼놓고 사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다. 가을엔 추위를 예고하는 시원함이 묻어나고, 겨울엔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주는 청량함이 가득하다. 오히려 제주의 봄바람이 매섭다. 겨울이 끝나는 지점에서 봄이 완숙해질 때까지 부는 바람은 변덕이 심한데다 이리로 왔다 저리로 왔다 도통 방향을 알 수 없이 불어 댈 때가 많다. 그 시기가 지나면 바람이 한층 무거워진다. 습기를 머금기 때문이다. 제주의 여름 바람은 그래서 혹독하다. 그 여름을 올해도 무사히 이겨낸 모두에게 박수를!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내부. 개인서재 같이 정갈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 소개글도 볼 수 있다.  (사진=요행)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내부. 개인서재 같이 정갈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 소개글도 볼 수 있다.  (사진=요행)

다시, 보경씨 이야기다. 장전리에서의 생활은 꽤나 만족스러웠고 지금도 그러하다. 자발적인 고립의 생활은 사회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접근을 막았다. 도시의 소음은 자꾸만 외부로 신경을 쏠리게 했는데 제주 자연이 주는 소리는 내면에 귀 기울이게 했다. 바쁘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보경씨 가족의 삶의 패턴이 점점 느려졌고 그 느림은 불편함이 아닌 여유를 안겨줬다. 삶이 제시한 흐름대로, 시간이 일러주는 흐름대로 살다보니 11년이 흘렀고 지금의 보경씨가 됐다. 

“저는 제주도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제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제주의 있는 그대로를 편견 없이 받아들였기에 제주를 사랑하게 된 것이리라. 겉으로 포장된 화려한 제주의 모습을 보고 이주를 결심했다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이곳의 풍토에 결국 섬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마스코트 '멍게'. (사진=요행)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마스코트 '멍게'. (사진=요행)

지금은 OO을 겪어야 하는 시기

서울에서 보경씨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종합병원에서 근무했고 제주로 오면서는 긴 휴식을 가졌다. 그러다 몇 년 전, 지인의 부탁으로 다시 복귀했는데 늘 일손이 부족한 양로원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제주 할머니들은 몸이 말을 듣는 그 순간까지 노동을 하는 점이 그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모두가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제주 할머니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을 이전까지는 본 적이 없다고. 그들이 신체적으로 때론 정신까지 어린이로 돌아가는 삶의 늘그막을 함께 하면서 보경씨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하고 인연 닿은 것 중에서 죽을 때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거 하나도 없어. 돈도 명예도 사랑도. 그러니까 애달복달 하지마. 안 그래도 돼. 시간이 지나면 너한테 와야 할 것은 많아. 그게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다 네 몫이야. 그냥 지금을 최선을 다해 살아. 그러면 돼.”

할머니들의 말씀은 ‘지금을 살아!’다. ‘지금만이 진실 된 순간’이라는 진리다. 

이런 말씀은 보경씨가 어떤 일을 겪을 때마다 좀 느슨한 마음을 갖게 해 주고 있다. ‘아, 지금은 내가 이걸 겪어야 하는 시기구나.’ 그러면 그 어떤 일에도 집착하게 되거나 마음이 들뜨거나 하지 않게 된다고. 

제주의 할머니와 자연이 가르쳐 준 삶의 비밀.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내가 살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는 것. 그러니 칼날을 치우고, 경계를 낮추고 바람을 느낄 것. 바람이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게, 흐를 수 있게 할 것. 

이것을 늘 잊지 않으려 또, 주변의 마음이 괴로운 이들에게 뭔가 위로가 되고 싶어 ‘마음공부’를 큐레이션으로 하는 숨 쉬는 오늘 그림 책방도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책방지기가 운영하는 요가원. 그는 요가와 독서를 겸할 수 있는 방법도 구상 중이다.  (사진=요행)
'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책방지기가 운영하는 요가원. 그는 요가와 독서를 겸할 수 있는 방법도 구상 중이다.  (사진=요행)

마더북스

보경씨는 책방에서 ‘마더북스’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 계획 중이다. 양로원에 부모를 모신 아들, 딸들 중에 자신의 부모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양로원에 계셔도 별다방 커피를 드시고 싶어 하시고, 호빵이 아닌 크로플에 메이플 시럽을 듬뿍 올려 드시고 싶어 하시지만 늘 가져오는 것은 식혜라든지, 단팥빵이라고. 

지금 우리 나이가 몇이든, 사회적 위치가 어떻든 사람이기에 갖는 공통점이 있다. 하루를 보낸만큼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 누구나 생의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훗날 내가 거동이 불편해 보살핌이 필요하게 될 때 자식에게 자신의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 바로 ‘마더북스’다.

40·50대의 여성을 대상으로 지금부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도록 하는 것,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림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깨닫고 정리하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취지다. 

“자식을 탓할 일이 아니에요. 사회가 부모는 자식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줘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입시킨 영향이에요. ‘내리사랑’이 세상의 모든 이치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죠. 부모를 부양의 대상으로 보지만 공경의 대상, 존중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안타깝게도 아직 얕아요.

부모도 마지막 그 순간까지 누군가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해요. 부모도 누군가의 아들딸이었어요.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주는 존재가 아니라 넘치도록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에요. 그 권리를 스스로 좀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의 안부를 묻는다는 건 내 주변의 이들의 안부를 묻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고 또 그래야 하는 곳이기에. 내가 평안하면 주변은 어떤지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각각의 평안한 ‘내'가 만나 ‘우리’가 된다면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이 줄고 배려와 사랑이 가득해지겠지. 

숨 쉬는 오늘 그림 책방에선 빨라진 마음의 시간을 자신의 리듬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그림책은 글자가 적고 어떤 책은 글이 없기도 하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결에서 바람이 일고, 소리가 들려온다. 그림책이 나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거기에서 발현된 ‘내’가 그림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들이 제 기능을 하는 그 시간을 찬찬히 음미해 보시길. 

 

책방지기의 추천 책
다니카와 슌타로가 쓰고, 오카모토 요시로가 그린 '살아 있다는 건' (사진='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SNS 갈무리)
다니카와 슌타로가 쓰고, 오카모토 요시로가 그린 '살아 있다는 건' (사진='숨쉬는 오늘 그림책방' SNS 갈무리)

#. 살아 있다는 건 (다니카와 슌타로 시·오카모토 요시로 그림, 권남희 옮김)

일본의 국민 시인으로 불리는 다니카와 슌타로는 1971년에 <살다>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를 아주 조금 각색해 글로 넣었고, 오카모토 요시로가 여름철의 소소한 일상을 따스한 색감의 그림을 그렸다. 

‘지금’의 의미, 그 가치를 일깨우는 책으로 남녀노소 누가 읽어도 또, 언제 펼쳐 보아도 마음에 평화로움을 안겨 주는 명작이다. 

 

※숨 쉬는 오늘 그림 책방은 제주시 애월읍 장유길 43에 있어요. 

매일 문을 열지만 책방지기는 오전에는 양로원에 있고 

오후 2시부터 책방에 있어요. 

그전에는 가족들이 책방을 본답니다.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