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덕 책방지기를 책의 세계로 이끌어 준 사람이 아버지라면, 그를 책방의 세계로 인도해 준 이는 故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이다. 구 소장이 그에게 ‘책방을 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도했다는 표현이 무리는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실행하라’는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
1998년 우리나라 서점가에서는 구본형 소장의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야말로 ‘구본형 돌풍’이 일었다. 그가 펴내는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기업, 언론사, 학교에서는 그를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는 반드시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됐던 때다. 그는 ‘맞다'고 말해도 되며 그것이 스스로가 자유를 획득하는 것임을 증명해 보인 이였다.
한국IBM이라는 대기업에서 경영혁신 기획과 실무를 총괄했던 구 소장은 마흔여섯에 퇴사를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살기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구소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했다. 그 제자 중 한 명이 정현덕 책방지기다.
현덕씨는 서른즈음 우연히 구본형 소장의 책을 접하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전까지 현덕씨는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미워해 왔었다. 자신이 나약한 사람이어서 겉도는 것이라며 꽤 오래 자책해 온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현덕씨는 누구보다 창조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틀에 박힌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그에게 맞지 않았을 수밖에.
현덕씨와 같은 이를 연구소에선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불렀다. 현덕씨는 공상이라고 치부했던 생각들을 실행에 옮길 자신을 얻었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현덕씨가 대기업을 퇴사한 것은 그의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맞았다.
처음 책방 문을 열었을 때는 자신처럼 ‘창조적 부적응’을 겪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앞서 소개한 연구소에서 나온 책들을 많이 비치해 두었다. 지금도 이 칸은 따로 마련돼 있다. 세상을 떠난 구본형 소장과 그의 제자들(지금도 제자가 계속 양성되고 있다)이 펴낸 책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열쇠가 되길 현덕씨는 기대하고 또, 응원한다.
그리고서점 서가에는 사서 자격증과 큐레이션 자격증을 갖춘 정현덕 책방지기가 엄선한 책들로 구성돼 있다. 시, 소설, 수필이 주를 이루는데 사실 요즘 이 책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학습지다. 그리고서점이 생기기 전까지 이곳 학생들과 주민들은 학습지나 문방구류를 사려면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그 번거로움을 이 책방이 덜어주고 있다.
현덕씨는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책들을 보는 눈이 있어서 학교와 계약을 맺어 교내 도서관에 비치할 책을 납품하고 있기도 하다. 그 책들과 학습지들로 책방 내부가 좀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어수선하되 기괴한 꾸밈이 없는 것. 있는 그대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게으름으로 보일 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감으로 보는 편이 맞다고 본다. 책방은 책으로 이야기는 하는 곳이므로.
자격증 이야기를 했으니 말인데 현덕씨는 바리스타 자격증, 독서 심리상담사 자격증, 동화구연 자격증 등 자격증 부자다. 단순한 마음으로 책방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하나라도 더 내어줄 수 있기를 꿈꾼다.
이곳은 독특한 포인트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만 15세 친구들이 이 제도에 참여할 수 있는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오면 1000포인트가 적립된다. 문제지를 풀어오면 2000포인트가 적립된다. 적립된 포인트로 서점내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이 제도를 잘 활용하는 친구들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숙제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도망가기도 했단다. 그래도 아이들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야기가 참 듣기 좋았다.
취재를 하던 날, <리빙 인 제주>의 저자 정용혁 작가가 책방에 있었다. 정 작가는 몇 해 전, 자신이 쓴 책을 알리려 이곳에 왔다가 책방지기와 인연이 깊어져 호형호제할만큼 가까이 지내고 있다고. 그는 ’그리고 서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비유적으로 이 책방(그리고 서점)은 대표님만큼 주민들이 굉장히 아끼는 곳이에요. 이곳은 책을 주문하면 책을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려요. 왜냐하면 대표님이 워낙 바빠서 제때 잘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 꼭 여기를 이용해서 책을 구매하셔요.
책을 가지러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질 않으세요. 오늘은 귤을 가져오셨네요. 지난번엔 두유, 호떡, 과자도 가져오셨었어요. 꼭 무언가를 꼭 챙겨오셔서 주시곤 하세요. 그만큼 이곳이 좋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자신의 동네에 책방이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성장하게 되잖아요. 그 점이 주민분들과 아이들에게 어떤 힘, 원동력 같은 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마을 책방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제공하는 시대잖아요. 도서관, 학교, 박물관 등 공공기관과 연계한 사업을 펼치고 작가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요, 마을과 연계된 사업도 하고요. 올여름엔 이곳에서 초당옥수수 200박스를 다 팔기도 했어요.”
이곳을 아끼는 이가 말하는 ‘그리고서점’의 매력. 이곳은 한 해 동안 약 50개의 사업을 주도한다. 1년에 52주니까 거의 매주 프로그램이 있던 셈이다. ‘시가 흐르는 마을 수산리’에 있는 만큼 책방에선 시낭송, 시 그리기, 시비 트레킹 등 관련 행사를 잇따라 마련하고 있다.
현재 수산리에는 116개의 시비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00대 시인의 시와 수산리 출신 시인의 시가 비석에 새겨져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산봉, 수산저수지, 천연기념물 곰솔, 밭담길 등을 두루 만날 수 있어서 산책 코스로도 매우 좋다고. 시비트레킹 행사를 할 무렵,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길가 잡초 제거도 해줬다니 그리고서점은 주민들에게 응원과 사랑을 받는 곳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주민들만 사랑하는 곳으로 알면 서운하다. 납읍리에 책방이 있던 시절에 20대 청년이 책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차분하게 책을 읽은 청년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현덕씨는 그날 저녁 책방에서 열리는 행사에 청년더러 오라고 권했다.
그날 저녁 행사는 책 ’변론을 시작헸습니다‘를 쓴 정혜진 변호사 초청 북토크 콘서트였다. 이 자리에 온 청년은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쏟아냈다. 행사가 끝나고 숙소가 협재에 있다는 청년을 현덕씨가 태워다 주면서 현덕씨는 청년의 사연을 듣게 됐다.
청년은 살면서 부모님이 정해준 길만 걸어왔다고 했다. 자사고를 졸업해 서울대에 진학하고 법학전문대학에서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데 어느날 회의감이 들었다고. 당시 주변의 친구들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이 없이 맹목적으로 공부만 했다고 했다. 촛불집회가 연일 뜨겁게 열리는데 학교에만 갇힌 스스로가 또, 부모님의 말대로만 움직이는 본인이 무서워졌다고
그는 그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말을 어기고 혼자 제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그리고서점에서 정혜진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 언젠가 판사나 변호사, 검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알게 됐다며 현덕씨에게 고마움을 담은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선택했던 제주행에서 청년은 바라던 것을 얻고 2주 뒤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올해 7월, 청년이 다시금 그리고서점을 찾았다.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밝아진 얼굴로. 청년 덕에 현덕씨와 가족들이 서울대 구석구석을 구경했다고 하니 서로 winーwin 한 것이라고 봐야하나?
현덕씨에게 책방 자랑을 좀 해달라고 하니 ‘서점 같지 않은 서점’이란 것이 자랑인 것 같다고 했다.
SNS이용자들이 선호하는 책방 풍경이 아니지만 책방이 맞으며, 독립서점치고 학습지 비율이 높아서 그렇단다. 글쎄, 그렇다면 과연 ’서점 같은 서점‘은 어떤 곳일까?
책방에 오는 누구에게나 조금은 느리지만 정다운 말투로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라고 묻는 책방지기가 있고, 동네 주민들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눠 주며 아이들이 편하게 와서 놀다 가고 자연스레 책과 친해지는 그리고서점. 오늘 나는 참 좋은 책방 한 곳을 더 알게 됐다.
#. 새는/박현욱
정현덕 책방지기는 2003년에 회사에 입사를 했다. 그해 송년회식 자리가 며칠 내리 있었는데 하루는 일찍 집에 들어갔다. 무심코 TV를 켰는데 EBS에서 <문학산책>이란 드라마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한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한 남학생이 여학생의 마음을 얻기 위해 1년 동안 기타를 배우는 등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다 1부가 끝나버렸다. 다음날 역시 송년회식 자리가 있어서 2부를 보지 못할 것 같아 현덕씨는 뒷날 점심시간에 회사 앞에 있던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다. 드라마 원작이 박현욱 소설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새는>이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중고등학생이었거나 청년들이라면 분명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다양한 요소들이 책에 등장한다. 갤러그, 프로야구, 죠다쉬 청바지, 두발 자유화 등이 그것이다.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시절의 첫사랑 이야기. 열심히 달려온 2022년의 끝자락에서 내 생애 ‘순수했던 때’를 회상하는 것도 좋겠다. 다시금 맑아진 마음이라면 희망의 새해를 들이기 좋으므로.
※그리고 서점은 제주시 애월읍 엄수로 167에 위치해 있어요.
월~금 10시~16시, 토 14시~18시까지 운영하고요.
일요일은 쉬어요.
매달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돼요.
관련 내용은 ‘그리고 서점’ SNS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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