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마농 다섯 뿌리에 찌뿌둥했던 몸이 활력을 되찾고, 메말랐던 가슴에 녹색 봄물이 물들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물오르는 달 삼월이다. 어머님이 90세 노구를 이끌고 꿩마농(달래)을 캐다가 겉절이를 하셨다. 어머님이 달래 줄기를 돌돌 말아 내 밥숟가락에 올려놓으신다. 매운바람 맞고 봄빛 머금은 달래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진다.
톡 쏘는 매운맛 때문일까, 봄 햇살 같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일까, 코끝이 찡해지고 눈에서 눈물이 번져 나온다. 어머님이 경칩(3월 5일)과 춘분(3월 21일) 사이에 먹는 꿩마농이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꿩마농 다섯 뿌리에 찌뿌둥했던 몸이 활력을 되찾고, 메말랐던 가슴에 녹색 봄물이 물들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달래와 냉이는 봄의 전령사이다. 그러나 냉이는 제주에서 봄나물의 대표 주자에 들어가지 않는다. 나도 지금은 옆지기가 해주는 구수한 냉이된장국을 즐겨 먹지만 대학에 다닐 때까지 냉이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시래기도 마찬가지다. 강원도에서 이사 오신 동네 여자삼춘이 달구지를 보관하는 곳에서 무 잎을 너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그때 든 생각이 ‘소가 설사가 나서 무 잎을 말려 먹이러나’였었다. 한겨울에도 우영팟(‘텃밭’의 제주어)에 나가기만 하면 푸른 송키(‘채소’의 제주어)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잎을 말린 시래기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사철 푸른 채소가 자라는 제주에서는 저장 음식이 발달하지 않았다. 생길이(‘무말랭이’의 제주어)와 마농지(‘풋마늘대장아찌’의 제주어)가 농산물로 만든 거의 유일한 저장 음식이었다.
건강을 지키는 음식 중에 제철 음식만한 것이 없다. 제철 식재료는 그 절기에 맞게 스스로 적응하여 자라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시기를 조절해서 키워낸 식재료보다 영양이 풍부하고 맛도 좋다. 노지에서 자란 상추가 하우스에서 재배한 상추보다 비타민이 훨씬 풍부하고 향도 진하다.
언제부터인가 제철이 어느 때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제철이 언제인지 물어보면 딸기는 겨울이고 참외는 봄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음식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혀의 행복을 상실하게 되었다. 절기와 무관하게 식생활을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태양의 황도(黃道·태양이 연주운동을 하면서 천구상의 별자리 사이를 지나가는 길:편집자)에 따라 황경이 0도일 때를 춘분으로 하여 360도까지 15도 간격으로 계절의 흐름을 24절기로 구분한다.
절기는 음력이 아니라 양력에 기반을 둔 것이다. 24절기는 주나라 때 화북지방의 날씨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그래서 제주도의 날씨와는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또한 근래 들어 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였기 때문에 절기의 날씨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절기는 농사짓기와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선 중요한 기준이다.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는 절기에 따른 농사일과 세시 풍속을 노래한 가사다. 절기에 따라 농업적으로 할 일과 절기 음식이 무엇인지 잘 노래하고 있다. 요새 절기인 2월령은 다음과 같다.
이월은 한봄이라 경칩 춘분 절기로다. …(중략)
반갑다 봄바람이 변함없이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힘차게 싹이 트고,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도다.
비둘기 소리 나니 버들 빛 새로워라.
보습쟁기 차려놓고 봄갈이 하여보자.
기름진 밭 가리어서 봄보리 많이 심고,…(중략)
산채는 일렀으니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리쟁이 물쑥이라.
달래김치 냉잇국은 입맛을 돋우나니,
본초강목 참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라.
창백출 당귀 천궁 시호 방풍 산약 택사
낱낱이 적어 놓고 때맞추어 캐어 두소.
농사는 때를 맞추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씨 뿌려야 할 때 씨를 뿌리고, 김을 매주어야 할 때 김을 매며, 거두어들여야 할 때 거두어들이는 것이 농사이다. 더 나아가 적기에 병충해와 잡초를 방제해야 한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그때까지 했던 일이 다 소용없게 된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면 태양과 별, 공기와 물, 땅과 생물의 흐름에 맞추어야 한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인 것이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약식동원(藥食同原))이라는 말이 있다. 음식과 약은 그 근원이 같다는 뜻이다. 건강은 모자라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균형 상태이다. 모자라거나 과하면 병이 온다. 제주사람이라면 제주 땅에서 나는 것을 제철에 거두어 가공하지 않은 채로 먹는 것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건강을 지키려면 골고루 먹으라고 한다. 골고루 먹는다는 말은 다양하게 먹으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절기 음식을 먹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절기가 달라지면 자연이 변하고 그에 따라 우리 몸도 달라진다.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게 되어 있는 우리 몸은 그 절기에 인류들이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고 있다.
제철 음식은 바로 그 절기에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공급하여 적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절기 음식을 먹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또 제철 음식에는 하우스에서 재배하거나 성장촉진제를 사용하는 등의 인위적인 환경조성에 드는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가격이 저렴하고 안전하다. 당연히 에너지 사용량도 줄어 기후온난화도 방지된다.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하고 피곤하다. 입맛도 없어진다. 그래서 몸은 다른 계절에 비해 3~5배의 비타민을 필요로 한다. 달래와 두릅, 취나물, 쑥, 방풍 등 쌉싸름한 봄나물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도 경칩이 되면 어머님처럼 꿩마농 겉절이를 내 딸에게 해줄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할 것 같은데 그때도 제주 들판에 꿩마농이 자라고 있을지가 걱정이다. 내 딸도 코가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꿩마농 맛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제주를 만들기 위해 더 애써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이번 일요일엔 딸애와 함께 어머님 댁에서 쑥전에다 꿩마농 겉절이를 얹어 먹으며 삼대가 봄맛을 나누려고 한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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